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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문학

캐나다에서 열린 격조 높은 국악의 향연

   
    홍보 기간 2주일. 체감온도 -25. 연말(1221). 게다가 많은 이들이 교회 출석 때문에 다른 활동을 꺼리는 크리스마스 직전의 일요일.

이 정도 조건이면 공연을 둘러싼 최악의 상황이다. <캐나다국악원 정기연주회 유경의 해금이야기2>는 이같은 악조건 속에서 열렸다. 그러나 토론토의 한국 음악 애호가들은 눈보라를 동반한 칼바람을 무릅쓰고 토론토 노스욕 중앙도서관 콘서트홀로 찾아왔다이곳에서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고급스러운 국악 공연인 데다, 한국에서도 보기 드문 국악과 양악의 격조 높은 협연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외국 땅에서 우리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동적인 일이지만, 이날 동서양 정상급 연주자들이 해금과 어쿠스틱 기타, 해금과 피아노의 협연으로 빚어낸 아름다운 선율은 60여 청중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뜻깊은 송년 선물이 되었다.

 청중 5~6백명을 불러모았던 이전의 정기연주회와는 달리, 짧은 홍보 기간 탓에 소수의 애호가들이 모였으나 그 규모와 관계없이 이번 정기 연주회 또한 벅찬 감동을 안겨주었다. 이같은 감동을 선사한 이는 캐나다국악원 유경 원장. 1999년 캐나다 토론토에 캐나다국악원을 설립하고 우리 전통 음악의 씨를 뿌려온 유씨는 캐나다를 대표하는 음악학교 RCM(Royal Conservatory of Music)의 윌리엄 보베(기타리스트) 교수와 RCM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한지연씨를 초청해 5년 만에 무대에 올랐다.



1999년 이후 토론토에서 국악 연주회  강습회  문화교실 들을 열어 우리 음악의 보급과 교육, 실험에 전력투구 해온 유씨는, 2004년 서울대 대학원에 진학해 최근 박사과정(연주학)을 수료한 후 토론토 무대에 다시 섰다.

 이날 무대에서 유씨는 지난 5년간 모국에서 연마한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나아가 그는 캐나다국악원의 특징이자 장기를 다시 한 번 과시했는데, 그것은 캐나다국악원이 꾸준히 추구해온 양악 연주자와의 실험적인 협연이었다. 유씨는 캐나다국악원 활동을 전개하면서 캐나다 사회와 캐나다 한인 사회에 우리의 소리를 전파하는 데 꾸준히 힘써온 한편, 국악의 외연을 자유분방하게 넓히는 데 심혈을 기울여 왔다.

우리 소리의 전파가 공연과 교육, 캐나다 국영방송(CBC) 출연 등으로 이루어졌다면, 국악의 외연 넓히기는 캐나다 정상급 연주자들과의 협연 및 녹음을 통해 이루어졌다.

1221일 무대에 선 윌리엄 보베 교수는 캐나다의 거장답게 우리의 국악을 연주하면서도 낯설어 하기는커녕 곡에 담긴 정서를 섬세하게 읽고 서정적으로 표현하는 거장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해금과 전자음악을 위한 ‘산 너머 구름’>(데이비드 모트 곡) <해금과 기타를 위한 계면가락 도드리> <해금과 피아노를 위한 한범수류 산조> 같은 레퍼토리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공연에서 연주된 음악들은 대부분 새롭고 실험적인 것들이었다. 게다가 제주도 꼴 베는 소리를 모티브로 한 <희야두리에>(성원 작곡)는 이날 초연되었으나, 두 연주자는 마치 익숙한 곡인 양 자연스럽게 연주했다.공연의 성격을 나타내는 ‘국악’ ‘클래식 협연’ ‘실험’ 따위 용어만으로도 일반 청중에게 지루함을 안길 수 있었으나 객석에는 90분 내내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윌리엄 보베의 기타는 부드럽고 섬세했으나 기타 특유의 단조로움이 있었다. 유경의 해금은 물이 스펀지에 스며들듯 그 단조로움의 틈새를 잘 메워나갔다. 현악기도 관악기도 아닌 해금은, 바로 그 중간 지점에 놓인 성격으로 인해 동서양의 어느 악기와도 잘 어울리는 탁월한 적응력을 다시 한 번 과시했다. 전통 민요 <아리랑>도 뜻밖의 감동을 안겨주었으며, 보베 교수가 편곡해 해금과 함께 연주한 나이지리아 민요 <수아요>는 마치 우리의 전통 음악을 듣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화여대 한국음악과(92학번) 재학 시절부터 조운조  조우주교수에게 사사하며 국악계 유망주로 주목되던 유씨는, 대학 졸업 후 이민 온 부모를 따라 토론토에 건너와 요크대학 민족음악과에서 공부했다. 동년배들이 국악 스타로 발돋움하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캐나다와의 인연을 계속 이어온 까닭은 1998년 토론토를 방문한 한명희 당시 국립국악원 원장의 권유 때문이었다. “네가 이곳에서 할 일이 많다.”

국악의 자유분방하고 실험적인 작업에 관심이 많았던 유경씨의 신세대 연주자다운 성향도 거기에 한 몫 했다. “정통적인 것을 지키고 가꾸는 것은 모국에서 할 일이다. 나는 모국에서와는 다른 좀더 자유스러운 연주를 이곳에서 하고 싶었다”고 유씨는 말했다.

그 자유스러운 연주를 위해 유씨는 외국 뮤지션들을 찾아 나섰다. 새로움과 실험을 추구하는 캐나다의 현대음악 연주자들은, 유씨의 협연 제안에 선뜻 응했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첫 번째 작품이2003 12월 연주회였다. 7백여 청중이 운집한 이 연주회에는 토론토 요크대학의 데이비드 모트(섹소폰) 교수와 아코디언 연주자 조셉 패트릭, RCM 교수인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카츠가 함께했다.




해금 특유의 소리와 서양 악기와의 절묘한 조화에 반한 서양 뮤지션들은 “다음에 또 하자”는 제안을 해왔다. 이번에 협연한 윌리엄 보베 교수도 새로운 소리에 단박 매료되었다고 했다. 보베 교수는 연주회 직후 “해금과 기타를 위한 곡을 쓰고 싶다”는 의향을 밝혔고, 며칠 뒤에는 유 경씨에게 전화를 걸어 “함께 녹음하고 싶다”고 제안해 왔다.

두 연주자의 녹음은 113일 토론토 다운타운에 있는 ‘뮤지컬 케미 프로덕션 녹음실’에서 3시간 여에 걸쳐 이루어졌다. 녹음 레퍼터리는 <해금과 기타를 위한 계면가락 도드리>, 나이지리아 민요 <수아요>, 한국 민요 <아리랑>, <희야두리에>(계성원 ), 해금 독주곡 <무여라>(조주우 곡), <해금과 전자음악을 위한 꿈>(조희영 )  10여곡에 이른다.

유씨는 “보베 교수가 오는 4월까지 해금과 기타를 위한 곡을 쓰기로 했다. 오는 8월로 예정되어 있는 정기 연주회를 마치고 작업을 보완하여 음반을 낼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공연 실황 음반을 낸 적은 있으나 녹음실 작업을 통한 음반 발표는 이번이 처음이다.

현재 한국의 단국대  국립국악원 등에서 강의하면서 토론토를 오가는 유씨는 “여건이 허락하는 한 캐나다에서 연주 및 녹음 활동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인 국악은 세계의 다른 한 켠 캐나다에서 서양 뮤지션들과의 협연을 통해 이렇게 조용히 ‘세계화’ ‘국제화’ ‘대중화’하고 있다.


*후기 :

1.  어느 잡지에 실으려고 썼으나 이런 저런 사정이 생겨 싣지 못했다. 이런 연주회는 한국에서 보기가 불가능하다. 윌리엄 보베 정도 되는 연주자를 초청하여 우리 국악과 협연하게 한다는 것은, 그 의미로 봐서는 몰라도 공연의 '흥행 성적'으로 봐서는 절대 무리이기 때문이다. 캐나다 토론토이기 때문에 가능한 협연이었는데, 나는 눈물이 핑돌 정도로 빼어난 이 연주가 국내에서 음반으로나마 들려지기를 바란다. 

2.  유경씨는 출산 한 달 전에 무대에 섰다. 둘째를 낳으면 당분간 공연을 하지 못하리라 여겨 이곳에 와서 거의 일주일 밤샘을 하다시피하며 공연을 준비했다. 작은 음악회였으나 수준이 높았고, 분위기 또한 '살벌'하게 좋았다. 피아니스트 한지연 또한 연주를 빼어나게 잘했다.


3.  위의 아름다운 사진은 모두 김상현이 찍었다. 사진만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운 연주회인가. 김상현은 서울에서 이름을 날리던 기자였다. 음악과 사진을 두루 잘 알아 연주 사진을 특히 잘 찍는 것 같다. 토론토에 살다가 얼마전 애드먼튼으로 옮겨갔다. 추위와 고독을 즐기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