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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문학

백조는 목욕탕에서 왜 헤엄치는가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 받은 첫 느낌은 ‘예쁘다’였다.

벽에 걸린 텔레비전 모니터들은 갖가지 예쁘고 재미나는 영상을 쏟아내고 있었다. 젊은 여성들이 오선지 위에서 음악에 맞춰 경쾌하게 고무줄놀이를 하는가 하면, 파란색 실선들이 두 기둥을 감아 올리며 화면을 가득 채워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벚꽃 피다(Cherry Blossom)>

천장에서 프로젝트로 쏘아 만든 전시장 바닥의 화면을 보면 분홍색 꽃잎이 하늘에서 툭, , 떨어진다. 제목이 <벚꽃 피다(Cherry Blossom)>인데 꽃잎 치고는 조금 작고 무거워 보인다.

전시장 왼쪽에 마련된 ‘비디오 상영관’에 들어가면 스크린 위에 좀더 재미있는 광경이 펼쳐진다. 1980년대에 유행한 텔레비전 CM송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요건 몰랐지, 요건 몰랐지? 0표 짜장면 0표 짜장밥.

사우나의 냉탕에서 한 여성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 오른쪽, 왼쪽으로 동동 떠다니며 마치 이 CM송을 부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작품 <백조>에서는 발레 <백조의 호수>처럼 우아하게 유영하다가, <북극곰>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동작을 빨리 하며 머리를 요리조리 돌린다.

<Polarbear>

지난 313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국문화원 갤러리에서 시작된 작가 이재이(Jaye Rhee) 씨의 다섯 번째 개인전의 전반적인 풍경이다. 'KAFA(Award)' 11회 수상자로 선정되어 326일까지 계속된 전시회이다. KAFA(Korea Arts Foundation of America)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한국인 미술 애호가들이 1989년 결성한 단체로, 1992년부터 미주 지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작가를 대상으로 이 상을 수여해 왔다선정 작가에게는 상금 1만 달러와 개인전 기회가 주어진다.

올해의 작가로 선정된 이재이씨는 시카고아트인스티튜트와 같은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뉴욕에 거주하며 국내외에서 개인전 및 그룹전을 통해 작품을 발표해왔다. 2003년 시카고컬처럴센터에서의 전시를 시작으로 뉴욕 ∙ 서울 · 파리 등지에서 개인전을 열어왔는데이번 전시는 이씨의 다섯 번째 개인전이다.

KAFA상 수상 기념전을 겸한 만큼이번 전시회는 젊은 작가의 6년 이력을 돌아보는 성격이 강했다비디오 작품 8점과 비디오 아트의 단면을 찍은 사진이 4점 나와 있다.

이재이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전복’으로 읽힌다고정관념 ‘뒤집기’ 혹은 ‘틀깨기’라는 다소 무겁고 진지하고 추상적인 주제는그러나 가볍고 재미있고 구체적인 방법론을 통해 어렵지 않게 풀려 나온다.“요건 몰랐지?” 하며 무거운 내용을 유머러스하고 가볍게 풀어내기이재이가 구사하는 소통 전략은 바로 이것으로 보였다.


<Swan>

“한국의 목욕탕에서 벽화를 발견하고는 ‘심봤다!’고 느꼈다. 작품이 내게 막 걸어오는 듯했다.” 이른바 ‘목욕탕 시리즈’로 명명된 작품 <백조> <북극곰> <나이아가라>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작품은 우선 만드는 나부터 재미있어야 한다”고 이씨는 말했다. 작가가 느끼는 그 재미는 보는 이들에게도 어렵지 않게 전달되어, 목욕탕 시리즈 앞에 서면 웃음부터 나오게 마련이다.

사우나 냉탕의 벽화는 그 냉탕을 시각적으로 더욱 차갑게 만든다. 이발소 그림이 순전히 실내 장식용이라면, 목욕탕 벽화는 장식뿐 아니라 실용성까지 두루 갖춘 ‘작품’인 것이다. 백곰들이 보이는 북극이나 백조가 노니는 호수 풍경을 보면 냉탕은 더욱 차갑게 느껴지지 않을까? 작가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스스로 북극곰과 백조가 되어, ‘냉탕 호수’에서 유영하며 북극의 풍경과 백조의 호수를 완성한다.

이재이의 ‘전복’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북극과 백조의 호수를 이렇게 눈에 익도록 추상화한 목욕탕의 벽화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감고도 그리는 그곳 풍경이다. 그 키치(Kitsch)적 풍경이 있고, 실제 호수(냉탕)가 있고 그 호수 안에 백곰과 백조들까지 노닐고 있으니 눈으로 보기에는 전형적인 그곳의 풍경이다.

작가는 ‘북극’이나 ‘백조의 호수’는, 우리가 머리 속에 임의로 그려놓은 이같은 풍경으로 존재할 뿐, 이런 풍경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일깨우는 것이다. 우리가 안다고 혹은 본다고 믿는 것, 그것은 ‘안다고’ ‘본다고’ 욕망하는 것일 뿐, 실제로는 그와 다르다는 얘기이다.


<나이아가라>

<나이아가라>를 보면 그 뜻이 좀더 분명해진다. 나이아가라에 가보면 우리가 알고 있음직한, 사진에서 보는 나이아가라의 존재는 진짜로 보기 어렵다. 다만 여행 가이드와 같은 내가 아닌 남들이 “이게 나이아가라다”라고 설명하는 대로 나이아가라는 보인다. 작가가 보기에, 우리가 믿는 것은 남의 지시에 따라 본 것일 뿐, 내가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재이의 화면에 나오는 사람들은 목욕탕 안에서 우비를 뒤집어쓰고 나이아가라 그림 앞에서 나이아가라를 ‘보는’ 대신 여행 가이드의 설명을 진지하게 ‘듣는다’.

이렇듯 이재이는 우리가 욕망 혹은 기대감으로 만들어낸 관념적 풍경과 실재가 어떻게 다른가 하는 다소 어려운 이야기를, “요건 몰랐지, 요건 몰랐지?” 하며 쉽고 유머러스하게 풀어낸다. 작가가 의도한 바를 잘 몰라도, 가볍고 장난기 섞인 방법론을 동원하는 바람에 보는 이들은 작가가 만들어놓은 스토리라인에 부지불식간에 발을 올려놓게 마련이다.

<음표들>

<음표들>의 경우는 어떤가. 아래 위 4개씩 모두 8개의 모니터 안에는 오선지를 가지고 고무줄놀이를 하는 여성 5명이 등장한다. 미국의 현대 음악 작곡가 엘리어트 샤프가 이 작품을 위해 썼다는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사람들은 콩나물 모양의 음표가 되어 똑바로 혹은 거꾸로 서서 경쾌하게 고무줄놀이를 한다. 청각과 시각의 전복. 귀에 들려야 할 음악이 오선지 위에서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듣는 음악’을 ‘보는 음악’으로 전환시킨 발랄한 전복이다.


<바다를 보았다(Seasaw)> <벚꽃 피다(Cherry Blossom)>의 전복은 색다른 양상이다. 작가는 어릴 적 침대 옆의 벽에다 파란 색칠을 하며 뛰어놀던 추억을 되살렸다. 기둥 2개를 5m 간격으로 사람 키 높이로 세우고, 그 두 기둥 사이를 오가며 실로 촘촘하게 감아 올라가는 퍼포먼스를, 무려 10시간에 걸쳐 계속했다.

  바닥에서부터 갖가지 푸른 빛깔이 알록달록하게 위로 올라가면서 하얀 공간은 순식간에 바다로 변해버린다. 파도 소리까지 곁들여지니, “이것이 바로 바다 풍경”이라고 소개하면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가짜를 진짜라고 믿는 고정관념에 대한 일종의 야유인데, 그 야유는 <벚꽃 피다>에서 더 거칠게 드러난다. 핑크 빛 화면에 뭔가가 툭, , 떨어진다. 껌을 씹어 뱉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벚꽃이 날리는 풍경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재이의 비디오 설치 작품들은 간단치 않은 주제를 작가가 몸으로 쉽고 간단하게 펼쳐 보인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 과정은 단순 명쾌하고 깔끔하게 이루어진다. 미국의 비평가 ∙ 큐레이터 등으로 구성된 3명의 KAFA상 심사위원들도 이재이의 작업에서 “절제되고 잘 다듬어졌다”는 데 높은 점수를 주었다.


작품 속에서 작가는 보는 사람이 지루해 할 정도로 단순 노동을 장시간 반복하고 있다. 10시간 넘게 기둥에 실을 감아 올리고, 5시간 동안 껌을 씹어 뱉는가 하면, 온몸으로 천을 천천히 찢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차가운 물에 몸이 퉁퉁 불을 만큼 오랜 시간 몸을 담그며 ‘위조의 세계’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작가는 “예술이기 때문에 용납되는 단순 반복 노동”이라고 설명한다. 우리 머리 속에 들어 있는 고정관념 혹은 욕망도 이렇듯 오랜 시간이 걸려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인터뷰 중에 이재이는 한국 시인과 시 들을 자주 화제에 올렸다. 고정관념을 깨고 새롭게 열린 세상이 시인이 쓰는 시의 세계라면, 이재이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바로 그 시의 세계와 닮아 보였다.

이재이씨는 쌈지아트레지던시에 이어 지난해 11월부터 1년 동안 국립현대미술관이 주관하는 창동미술창작스튜디오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파란색 계통으로 구사하는 새로운 작업을 구체화하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월간미술> 2009년 5월호부터 시작한 '뉴욕의 이방인' 시리즈의 첫번째 글. 이 글에 대한 독후감은 http://2kim.idomin.com/920에 가면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