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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문학

리영희의 <대화>, 그 절절한 감동




  고1 때였을 겁니다. 광화문 새문안교회 마당에서 박동규라는 친구가 무슨 책을 보여주었습니다.  평소에 친하지도 않았던 그 친구와 왜 그곳에 갔는지, 그 친구는 왜 그런 책을 보여주었는지 기억에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책 제목은 기억에 뚜렷이 남습니다. <전환시대의 논리>. 그 친구는 재미있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대학에 가서 재미있는 줄 알고 그 책부터 샀습니다. 재미도 별로 없고, 무엇보다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저자의 저작들이 중국과 베트남에 관한 내용들이어서, 물론 넓게 보면 한반도 문제와 직결되는 사안이기는 했으나, 에둘러 생각하고 읽기에, 마음이 좀 다급했습니다. 게다가 정밀한 분석서들이어서 읽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았습니다.

  당시 대학생들이 그랬듯이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 <중국백서> <베트남전쟁> 등
리영희 선생 저작물이 나올 때마다 꼬박꼬박 사두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의무감에 읽었던 탓에 겉핥기 식으로 넘어가기 일쑤였습니다. 

   이민을 와 있는 사이에 한국에서 많은 일들이 벌어졌고, 그 일들은 '나도 나이를 먹는구나' 하는 생각을 부지불식간에 하게 합니다. 작년 12월 리영희 선생의 작고 소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다놓고 읽지도 않았던 리영희 선생에 대한 갑작스러운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블로그에 추모의 글을 올린 김훤주에게 책을 보내달라고 청했더니 고맙게도 두 권을 보내왔습니다. 2005년에 나온 <대화>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벌써 읽어서 다들 잘 아시겠습니다. 700쪽이 넘는 두터운 책이었습니다. 이 책을 끼고 다니며 한 줄 한 줄 '아껴가며' 읽었습니다. 문장을 읽고 또 읽으면서 한탄을 많이 했더랬습니다. 리영희 선생 글을 진작에 볼 걸, 진작에 볼 걸 하면서...

  특히 후회가 되었던 점은, 기자로 일할 때 왜 찾아보지 못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한겨레신문에 실리는 칼럼 정도나 보았지, 그 많은 저작들에는 한번도 눈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단지 한물 간 사회과학 서적 정도로만 생각했었고 주위의 어느 누구도 '대단하다'고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당연한 사실이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이사를 다니면서 사회과학 서적들이 버려지는 것에 섞여 리 선생의 책은 모두 버려졌고, 이민 가방에는 단 한 권도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후회막급입니다.

  기자를 하면서 읽었다면 정말 좋았겠다, 아니 반드시 읽었어야 했다 싶은 내용 가운데 몇 가지만 구체적으로 지적하다면, 먼저 김산의 <아리랑>에 대해 꼽을 수 있습니다. 김산 연구자들을 찾아 거의 사선을 넘다시피 하며, 중국과 국교도 맺기 전에 중국 출장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우리 데스크는 다녀온 나에게 "무사히 돌아와준 것만 해도 고맙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아리랑>을 리영희 선생이 국내에 소개한 줄은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동녘출판사 사장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두번째는 일본 이와나미 출판사의 로스케 사장과의 인연입니다. 1990년대 중반 저 이를 어쩌다 인터뷰하게 되었는데, 어디서 어떻게 인터뷰 거리를 만들어야 할지 정말 난감했습니다. 입국 금지 조처가 풀려 들어온 거물이라는데, 우리 회사 내에서도 크다는 것만 알 뿐 어떻게 얼마나 큰지 아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를 좀 아는 어떤 문학 평론가를 김 훈 당시 사회부장이 소개해줘서 질문거리를 간신시 몇개 가지고 갔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로스케 사장이 한국 독자가 궁금해 할 만한  의미있는 내용들을 이것저것 많이 이야기해 주어서, 정말 고맙게 생각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와나미 사장뿐 아니라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들과 동지처럼 지냈던 선생이 있는데,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런 내용들은 내가 <대화>를 읽으면서 가졌던 아쉬움 정도이고, 정말 무릎을 치며 안타까워 했던 것은 중국과 베트남 현대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중국 혁명은 물론 베트남 전쟁에 관해서도 에두르고 에둘러서 그 진상을 희미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리영희 선생의 책을 보았더라면, 직접적으로 정확하게 파악했을 것을, 왜 진작 모르고 그렇게 어렵게 했었나 하고 나 스스로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방공간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 이승만에 대한 평가, 중국에서 활동한 좌익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평가는 물론이고 기자로서 일하던 시절 직업인으로서의 자세에 관한 것에 이르기까지, 왜 지금에 이르러서야 알았을까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미국의 실체에 대한 분석에 이르러서는 안타까워서 한숨이 다 나올 지경입니다.
 
  현역 기자 가운데 미국 <워싱턴 포스트>에 칼럼을 게재한 이가 누가 있을까, 미국이 수십년만에 공개한 그 방대한 자료들을 다 훑고 난 뒤 정밀한 논문으로 정리한 이는 또 누가 있을까 하는 데 이르러서는, 이념의 다름을 떠나 기자와 학자로서 모두에게 존중 받아 마땅한 어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분과 동시대에 살았다는 것, 이런 기자와 학자가 남긴 저작물을 한글로 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토론토에서 리 선생의 책을 수소문하고 있는데, 아직 아무런 성과가 없습니다. 한 권이라도 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