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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문학

제주올레 완주기 '폭삭 속았수다'를 쓴 이유


  제주올레 완주기 『폭삭 속았수다』가 책이 되어 나왔습니다. 지난 한 주, 새로 나온 책을 맞으러 한국에 갔다가 캐나다 토론토 집으로 막 들어온 참입니다.



  강출판사에서 책을 냈는데 총 490쪽에 이릅니다. 컬러 사진을 많이 쓰고 편집도 좋습니다. 강출판사의 솜씨를 믿고 기대하기는 했지만 기대 이상치의 결과물을 만들어냈습니다.


 책이 나온 지금, 캐나다에 사는 내가 왜 이 책을 썼나를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열흘 동안 한국에 다녀오면서 몸이 몹시 피곤합니다. 제주올레길을 걸으러 갔던 작년 5월이라고 몸이 지금보다 피곤하지 않을 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425km나 되는 길을 어떻게 다 걸었으며, 20일 동안 길 위에서 만난 풍경과 사람 이야기를 또 어떻게 글로 적었나 하고 책을 보면서 나 스스로 조금 놀랐습니다.


  제주올레길을 걷자고 마음을 먹고, 길을 걷고, 책을 쓸 당시에는 이 일이 내가 놀랄 정도로 큰 일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만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재작년 9월 우연한 기회에 경북 지역의 외씨버선길을 걸었고 작년 3월 같은 제목으로 책을 펴냈습니다.


  책을 낸 후 뿌듯함보다는 허전함이 컸습니다. 허전함은 다름아닌 새로운 갈증에서 연유하는 것이었습니다. 외씨버선길 등 한국의 모든 트레일과 걷기 문화는 제주올레길에서 시작되었는데 제주올레길을 걷(쓰)지 않고 책을 낸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계획을 세우고, 출판사 하고 이야기가 되자마자 바로 제주도로 건너갔습니다.


 13시간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야 하니 제주도로 걸으러 가는 것이 캐나다에 사는 나에게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생업이 있어서, 내가 빠지면 이만저만 무리가 따르는 게 아닙니다. 막 바빠지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혼자 고생해야 하는 아내의 수고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일하는 사람을 임시로 써야 합니다. 그래도 마치 해야 할 의무라도 되는 양 나는 열에 들떠 있었고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 데 조금의 주저도 없었습니다.


  돌이켜보아도 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시차로 인한 피로와 졸음은 가히 '살인적'이라 할 만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합니다. 과거 직장에서 출장을 갔을 때 시차고 뭐고 따질 겨를이 없었습니다. 제주올레길을 걸을 때도 똑같았습니다. 걷는 것이 쉽고 수월했다면 별로 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풍경은 더없이 아름다웠으나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을 인터뷰하기가 용이하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서야 속사정을 듣고 이해하게 되었지만 제주도 사람들은 외지인의 질문에 친절하게 응답해주지 않습니다. 또한 길을 걸으며 쉬러온 사람들에게 '왜 왔느냐'고 성가시게 따라붙기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과거 기자 시절에 만들어놓은 질기게 달라붙는 습성이 없었더라면 말 붙이기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말걸기보다 더 어려웠던 점은 제주도의 풍속과 문화에 대한 이해였습니다. 제주도는 우리나라지만 제주도에 대해 얼마나 무지, 무식한가를 길을 걷자마자 바로 확인합니다. 신혼여행을 비롯해 잦은 제주도 여행으로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제주도를 잘 안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산·오판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육지와는 전혀 다른 고유의 전통 문화와 풍습이 있고, 많이 옅어졌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그 문화는 제주도를 움직이는 근간이자 바탕으로 작용합니다. 그런 문화를 처음 접했을 때의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습니다. 감귤나무가 지닌 역사 하나만 가지고도 책 한 권은 너끈히 써낼 정도로 갖가지 깊고 다양한 사연이 많습니다.


  더없이 아름답고 장엄한 자연 풍경에 감탄하고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했습니다. 제주올레길을 걸으며 가장 놀라워 한 것은 누대에 걸쳐 쌓아온 제주도 사람들의 자연과 외세에 대한 '응전'이었습니다. 응전이라는 용어가 무거우면 요즘 유행하는 '응답'이라 해도 좋겠습니다. 공동체에 대한 한없는 사랑, 그것은 애향심입니다. 애향심들이 모이면 우리가 귀가 따갑게 들으며 교육받은 애국심입니다. 제주도의 애향심, 애국심은 육지에서 구호로만 교육된 것과는 정반대로 구체적이고 내용이 있습니다. 육지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문화와 전통이 제주도의 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하나 하나 보고 듣고 기록하다 보니 글이 길어졌습니다. 더불어 제주올레길에서 상처입은 마음들을 진정시키고자 온 사람들의 이야기도 마음에 많이 와 닿았습니다. 제주올레길을 걸으러 온 이들 가운데, 가장 좋은 기운을 뿜어내는 올레꾼들은 바로 살림살이에서 해방된 주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1박2일의 짧은 여정 속에서도 평소 꿈꾸었던 제주올레길을 아주 맛나게 걷고 있었습니다.


  2012년 11월 제주올레길이 제주 섬 전체를 한 바퀴 도는 트레일로 완공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올레길에서의 살인 사건이라는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나 완공을 널리 홍보하지 않은 이유도 있고 애초 올레길 문화의 충격이 워낙 거세어서 완공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은 탓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같은 점이, 완주기를 쓰려고 하는 나에게는 좋은 조건이자 명분이 되어주었습니다. 


  한국의 내 친구들은 "놀랍다"고 했습니다. 나는 답했습니다. "내가 한국에 살았더라면 하지 못했을 거다." 외국에 살고 있으니 나에게는 모국이자 외국인 한국의 제주올레에 해외 출장 가는 기분으로 갔습니다. 출장지에서 노는 기분으로 걸었으니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생업을 가졌더라면 엄두도 내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기분 좋게 걸었고,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책을 썼고, 책이 나왔습니다. 책이 잘 만들어져서 필자로서 편집자에게 머리를 숙여 고마움을 표하고 싶습니다. 왜 걷는가를 다시금 생각합니다. 도보 여행은 여행의 최고 경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걸으면서 만나는 자연과 사람 들은 참 색다르게 다가옵니다. 걷기 여행의 이 맛을 들였기에, 제주올레 완주에 나섰습니다. 제주올레, 곧 제주도는 짐작보다 훨씬 많은 풍경과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낯선 곳에 나를 밀어넣고 객관화시켜보기. 여행의 참맛 중의 하나가 이것이라면 제주올레는 최상에 가장 근접한 여행지일 것입니다. 책만 보아도 그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길을 다 걷고 나니 완주자에게 훈장을 달아주었습니다. 제주올레 사무국 앞에서 남쪽 바다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입니다. 이 사진을 찍을 때 나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정말 수고 많았다." 이를 제주말로 옮기면 "폭삭 속았수다"가 됩니다. 길을 만든 사람들도, 길을 걷는 사람들도, 책을 만든 사람들 모두 폭삭 속았습니다. 이 말은 누구보다 제주도에서 살아온 사람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입니다. 완주를 하고 나면 이 말이 절로 나오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