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토에 살러오고 얼마 안되어 학교 동문회 모임에 나갔다가 퍽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 자리에서 십수년 선배 되는 분이 미국 유명 대학에 재학 중인 아들 자랑을 겸해 들려준 이야기였다. “우리 아이가 기숙사에 들어갔는데, 어쩌다 보니 룸메이트가 백인 여학생이라는 거야. 임시라지만 말이야. ‘문제는 없는 거야?’라고 물었다가 아들한테 창피만 당했네.”

[시선]여자보다 사람이 먼저다

아버지는 평범한 한국인 부모답게 대학생 남녀가 같은 방에서 생활하면 무슨 문제나 생기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 걱정의 내용을 알아차린 아들은, 아버지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고 했다. “그런 일 없어요. 여자 친구도 아닌데 어떻게 같이 잠을 자요?” 아버지는 말했다. “여기서 자란 아이들은 우리 하고는 참 많이 달라.” 그 이야기를 들을 당시에는 나도 ‘청춘 남녀가 한 방을 쓰면서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면서 그런 의구심은 차츰 사라졌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다. 딸아이는 ‘보이’들 하고만 주로 놀았다. 4~5학년이 될 때까지 여자 친구가 거의 없었다. 남자 아이들 집에는 수시로 놀러가고 그 집 가족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우리 집에 놀러온 외국인 남자 아이들도 우리 가족과 함께 한국 식당에 가서 밥을 먹었다. 딸아이는 “여자는 친구로 왜 안 사귀는데?”라는 질문에 정색을 했다. 친구면 친구지 남자든 여자든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었다.

중학생이 되면서 차츰 달라지더니, 고교 진학 후에는 친구의 남녀 비율이 역전되었다. 그래도 남자 친구들은 여전히 많았다.

딸아이의 교우 관계를 지켜보면서 새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이곳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친구는 그냥 친구일 뿐이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친구는 동성이든 이성이든 다를 바가 없다. 대신 연인 관계에 있는 ‘이성 친구’와 ‘이성 사람 친구’는 확실하게 구분한다.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면서 아이들은 늘 남녀가 함께 놀았다. 남녀가 아니라 사람끼리 어울리는 것이다.

‘사람 친구’와 ‘연인’을 구별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딸아이가 ‘남자 사람 친구’ 집에 가서 밤늦게까지 있어도 별 걱정을 하지 않는다. 대학생이 된 지금도 딸아이 방에 고교 시절 ‘남자 사람 절친’이 와서 함께 공부하고 놀다 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젊은 남녀가 그렇게 지낸다 한들 문제될 것이 없다. 어릴 적부터 학교에서 ‘남자’와 ‘여자’가 아닌 ‘사람’을 사귀고 대하는 법을 자연스럽게 배우고 익혀왔기 때문이다.

이성을 남녀로 갈라 구분하지 않고 그저 사람으로 대하고 교유하는 문화 속에서 성장했으니, 청춘 남녀가 기숙사 룸메이트가 되어도 크게 개의치 않는 것이다.

한국에서 미투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는 와중에 일부 남성들 사이에서 여성들을 아예 피하고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뉴스를 보았다. 과거 중·고교 때처럼 남자와 여자 사이에 높은 담장을 치자는 것과 다름없는 발상이다.

이성에 대해 가장 예민한 중·고교 시절, 지금 기성세대는 이성에 대해 배우고 한 인격체로 받아들이는 법을 어디서고 배우지 못했다. 나아가 이성과 어울리는 것을 죄악시하는 풍토 속에서 10대를 보냈다. 여성을 남성과 똑같은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교육과 훈련을 받은 바 없으니, 미투 운동에 그렇게 용렬한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노르웨이 같은 나라에서는 남녀 병사가 서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내무반에서 함께 생활하는 세상인데, 사람이 사람에게 다시 선을 긋고 차별하려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출처 : 경향신문 3월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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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성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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