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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살이

'파친코'를 보며 드는 생각...이민자는 영원한 이방인

요즘 애플TV+ 드라마로도 화제를 모으고 있는 소설 <파친코>를 알게 된 것은 몇 해 전이었다. 별 관심을 갖지 않았는데도 관련 소식이 자꾸만 들려왔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나로서는 소설 외적인 부분이 퍽 궁금했다. <파친코>의 작가 이민진은 미국에 사는 한국인 이민 2세라고 하는데, 미국이 아닌 일본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왜, 어떻게 썼을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미국 작가가 재일동포 가족사를 소재로 작품을 썼다는 것이 흔치 않은 일이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파친코’라는 제목이 특이해 보였다. 7세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살러간 한국인 1.5세가 일본 사회를 어떤 관점으로 취재하고 풀어냈는가 하는 것도 퍽 궁금했다.

2002년 캐나다로 이주한 필자가 거주하고 있는 토론토 동네 풍경. 이민 생활 20년을 넘긴 필자는 캐나다와 한국 사회 양쪽의 이방인이 되어 살고 있다고 고백했다.

외국에서 살다보면 이런 궁금증이 생겨도 바로바로 답을 찾기가 쉽지 않다. 내가 사는 곳이 영어권이라고는 하지만 꼭 해야 할 숙제 같은 것이 아닌 이상 영어 책보다는 한글로 쓴 다른 책에 손이 먼저 가게 마련이다. ‘미국에 살면서 재일 조선인 이야기를 쓰는 데 한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은연중에 있었을 것이다. 작가의 역량이 아무리 탁월하다 한들 ‘외국인’이라면 그 복잡한 문제의 핵심을 파고들기가 다소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소설 <파친코>와 관련해 들려오는 소식들은 심상치 않아 보였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세계 유명 매체들이 잇달아 호평하고 ‘올해의 책’으로 선정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같은 유명 인사가 “매혹적인 이야기”라고 했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한국어를 포함해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와 같은 뉴스가 계속 쏟아졌다. 소설 <파친코> 관련 뉴스들은 내가 일부러 찾지 않아도 온라인을 타고 저절로 당도했다.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뉴욕타임스 등 호평 잇달아 궁금
부랴부랴 책 구해 보니 흥미진진

한국 떠나 캐나다 시민권자 생활
캐나다인도 한국인도 아닌 중간

자작가도 이민 2세…그 아픔 알기에
낯선 땅 동포들의 정서 표현 탁월
드라마 ‘파친코’도 단박 빠져들어

 

아무리 화제작이라고 해도, 역시 손에 잡기가 쉽지 않았다. 앞서 언급했거니와 ‘부담 없이 읽을 만한’ 추리물도 아닌데 굳이 영어로 읽는 수고를 해야 한다는 게 선뜻 내키지 않는 탓이다. 영어로 된 본격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달리기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마침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라 한국에서 번역서를 들여오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내가 사용하는 전자책 사이트에서도 검색되지 않았다.

 

신기한 사실은,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내가 결국 책을 손에 쥐게 되더라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책이 지닌 힘이라고 믿는다. 예전부터 누가 보라고 강요하지는 않았으나 이것만은 꼭 봐야 한다고 생각하게 하는 공연, 전시, 영화, 책들이 있었다. 이번에는 소설 <파친코>가 그랬다. 한국 배우 윤여정과 이민호가 캐나다 서부 빅토리아섬에서 드라마 <파친코>를 촬영 중이라는 뉴스를 접한 뒤에는 읽는 것을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드라마를 보고 나면 원작 소설을 읽는 재미가 반감될 것이기 때문이다.

 

부랴부랴 영어 책을 구해 읽기 시작했다. 책에서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이야기 자체가 흥미진진했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 또한 탁월했다. 특히 이민자인 내 눈에 도드라져보이는 것이 있었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을 떠나 낯선 땅에 사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정서 같은 것이다. 자발적으로 떠났느냐, (반)강제 이주를 당했느냐 하는 차이는 있을 수 있겠으나 어떤 이유로든 자기 나라를 떠나 사는 사람들에게는 남다른 정서가 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공유하는 감정과 정서를 이렇게도 한번 경험했었다.

드라마 <파친코>의 주인공 선자가 남편을 따라 오사카에 도착한 장면. 애플TV+ 제공

십수년 전 한국의 재외동포재단이 주최하는 재외동포문학상을 받게 되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미국, 캐나다, 독일, 중국 등지에 사는 재외 한국인 7명이 상을 받으려고 서울에 모였다. 시, 소설, 산문 부문 수상자들이었다. 수상자 초청 프로그램에는 문학상 심사를 맡았던 유명 문인들이 동행하는 제주도 방문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주도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재외동포들이라고 해도 문학상을 받은 ‘신인’이라면 한국의 유명 시인, 소설가들에게 큰 관심을 보일 법하다. 주최 측이 심사위원들을 여행에 동행케 한 것은 수상자들에게 주는 일종의 ‘선물’이었다. 책으로만 접하던 시인, 소설가와 2박3일을 함께 보내며 글쓰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우리에게 뜻깊은 기회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묘한 일이 벌어졌다. 수상자들은 자기들끼리 놀기에 바빠서 유명 문인들과 어울리지를 못했다. 결국 문인은 문인끼리, 수상자는 수상자끼리 시간을 보냈다. 외국살이하는 우리끼리 나누는 대화가 훨씬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나라를 떠나 사는 사람들이 갖는 정서적 공감대가 글쓰기에 대한 열망이나 궁금증을 압도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독일에 간호사로 파견되었다가 그대로 눌러앉았다는 이야기, 대기업 지상사 직원으로 미국에 나갔다가 이민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나처럼 아예 작정을 하고 이민을 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서로 다른 나라에 사는 한국 사람 각자의 사연들이 흥미롭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서로가 위안을 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문학상 수상자들이 열심히 글을 쓰는 이유는 결국 우리나라를 떠나 사는 데서 오는 일종의 상실감 때문인 것 같았다.

 

소설 <파친코>와 드라마 <파친코>에 단박 빠져들면서도 이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일본에 사는 ‘조선인’들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이민자인 나에게 각별하게 다가오는 것이 많았다. 자기가 나고 자란 땅에서 사는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이민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가령 이런 것들이다. <파친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겪는 비극 가운데 가장 크고 구체적인 것은 일본 사회에서 받는 무시와 차별이다. 재일동포나 재중동포들은 나 같은 북미 이민자들과는 처지가 많이 다르다. 한국 땅을 자발적으로 떠났느냐, 거의 강제로 밀려났느냐의 차이가 있기는 해도, 어쨌거나 우리나라를 떠나 사는 사람들만이 갖는 감정과 정서는 비슷하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중간지대에 산다는 느낌, 곧 영원한 이방인이라는 느낌이다.

 

나로 말하자면, 캐나다 시민권자이지만 온전한 캐나다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제는 순수한 한국 사람도 아니다. 캐나다에서 오래 살면 살수록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어정쩡한 감정이 점점 더 커진다. 내가 사는 캐나다는 여전히 외국 같고, 내가 떠난 한국 또한 외국 같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그런 느낌이 자꾸 든다. 캐나다는 아무리 따라가려 해도 잡히지 않고 한국은 날이 갈수록 점점 멀어져간다.

물론 일본에 사는 외국인들이 겪는 차별은 북미 이민자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하다. 일본에서 태어났으나 귀화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10대 소년에게도 3년마다 지문을 찍게 하는 일이라거나, 변변한 직업을 갖기 어려워 ‘파친코’ 같은 사행산업에나 종사하게 만드는 사회적 집단 차별은 북미에서는 범죄로 간주된다.

 

이 같은 노골적이고 야만적인 차별이 없다고는 해도, 이민자의 나라라는 캐나다에서도 이민자들이 차별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신규 이민자가 캐나다에서 취직을 하려 하면 ‘캐나다 경력’을 요구한다거나 인맥으로 직원을 채용하는 문화를 한번이라도 경험하고 나면 우리나라를 떠나 사는 사람의 슬픔 같은 것이 생겨난다. 외국살이를 선택했다는 것 자체에 그런 정도의 차별은 감수하겠다는 뜻이 포함되었을 수도 있겠다. 이민자의 숙명이다.

 

드라마 <파친코>에서 선자의 윗동서인 경희는 선자와 함께 남편 요셉이 진 빚을 갚으러 가면서 말한다. “나는 (우리 고향집에서) 밥도 한번 안 해보고 빨래도 안 해봤어. 사람을 만나도 (이렇게 험한 사람들이 아니라) 부모님이 아는 사람들만 만났어.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라는 것은 이민 1세라면 누구나 스스로에게 자주 했던 질문이다. <파친코>의 주인공들처럼 도박산업에 종사하든 길거리에서 김치장사를 하든, 캐나다 드라마 <김씨네 편의점> 주인공처럼 구멍가게를 운영하든 그래도 열심히 노력만 하면 경제적으로는 안정을 찾을 수 있다. 문제는 나 같은 이민자들이 문화적으로나 정서적으로는 오도가도 못하는 중간자 신세가 된다는 사실이다. 한국 근대사의 비극적인 희생자라고 할 만한 일본 재외동포들의 처지는 더 참담하다. 일본에서 태어난 선자의 아들 모자수는 말한다.

 

“서울에서는 나 같은 사람들을 일본인 새끼라고 불러. 일본에서는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아무리 근사하게 차려입어도 더러운 조선인 소리를 듣고. 대체 우리 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는 모자수의 이런 마음을 잘 이해한다. 캐나다에 사는 나는 이렇게까지 불행한 처지에 놓인 것은 아니지만 캐나다와 한국 사회 양쪽의 이방인이 되어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캐나다에서 20년을 살아도 이 나라 문화에 동화하지 못한다. 그저 익숙해질 뿐이다. 한국을 돌아봐도 이제는 낯설기 그지없다. 정서적으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서 생겨나는 슬픔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진다.

 

소설 <파친코>를 다 읽고 나서, 이 소설이 전 세계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은 이유를 내 나름으로 생각했다. 작가 이민진이 일본이 아닌 곳에 사는 한국 이민자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일본 바깥에서 살고 있기에 재일동포들의 처지를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작가 스스로 이민자의 자식이어서, 같은 이민자인 재일동포들의 아픔에 누구보다 깊이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민자인 내가 보기에, 북미 재외동포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불행한 처지에 놓여 있던 재일동포들에 대한 작가의 깊은 공감이 <파친코>가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이다. 일본에 사는 한 조선인 집안의 비극적인 삶이라는 특수한 소재로 쓰인 소설이 전 세계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바로 그런 힘 때문이다.

 

‘경계인’이라는 코너 제목으로, 한글로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조금 불안하다. 내가 쓰는 글의 스타일이나 문체가 한국 독자들의 눈에 고루하게 보이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다. 한국에 살 적에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경향신문 4월22일자 성우제의 경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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