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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이야기

친일파와 빨갱이, 누가 더 나쁜 놈일까


  

  어제 어느 인기 블로그에 우연히 들어갔다가 나보다 조금 더 들어 보이는 중년 남성 두 사람이 백주대낮에 대학 정문 앞에서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영상을 보았다. 처음 만난 듯 보이는 두 사람은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속설을 신봉하는 듯 상대방의 말에는 요지부동, 오로지 자기 말만 늘어놓았다. 그 말에는 원색적인 육두문자가 섞여 있었다. 생명부지의 두 사람, 각기 한 가정의 가장이요 자식을 키울 법한 두 사람이 벌건 대낮에 장터 투전판도 아닌 대학 앞에서, 얼굴을 붉히며 싸우는 모습은 한편으로는 우습고, 또 한편으로는 슬퍼 보였다. 블랙코미디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보였는데, 두 사람을 뜯어 말리던 사람이 친일파 편을 드는 사람을 보고 진짜 이렇게 말했다. "왜 자꾸 이래요? 지금 1박2일 찍어요?"

   내가 사는 캐나다에서라면 절대 벌어지지 않을 낯선 풍경이다. 어디 캐나다뿐일까? 전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처음 만난 중년 사내들이, 그것도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처럼 보이는 이들이 서로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싸우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말이다. 식민지와 전쟁을 연이어 겪은 나라가 세상에 또 있나?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하는 두 사람의 언설은 현란했으나 그것을 단순화하면 딱 두 마디로 정리되었다. 

                                                     "빨갱이"

                                            "친일파"

  과거 한국에 있을 때부터 느낀 것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 두 가지 트랩 가운데 하나에만 걸려들어도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요즘은 세상이 많이 바뀌어 스스로를 "좌빨"이라며 유쾌한 자기 비하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용공분자'라는 무시무시한 용어가 위력을 떨친 시대는 불과 10여년 전까지 지속되었다.

  친일파는 또 어떤가. 요즘은 빨갱이보다 더한 욕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내가 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그다지 내놓고 교육하지 않던 부분이다. 아마도 유신교육을 받은 세대여서가 아닐까 싶은데, 친일파 하면 그저 '이완용' 정도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일제강점기에 한반도에 살면서 어느 분야에서든 떵떵거린 인사치고 친일파가 아닌 이가 없었다. 심지어 종교계에서도 그랬고 언론인 장지연처럼 지사로 알려진 이들 가운데 변절한 사람도 많다니, 혀를 찰 노릇이었다. 

  좀 다른 이야기를 해야겠다. 1992년 좌파 독립운동가들을 취재하기 위해 중국 출장을 간 적이 있다. 항일투쟁의 치열함만 놓고보자면, 임시정부의 그것은 비교조차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좌파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은 대한민국이든 북조선인민공화국이든, 남북 어느 교과서에도 올라 있지 않다.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싸운 한국(조선) 사람들이, 싸움의 와중에서는 물론 싸움이 끝나고도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항일투쟁에 젊은 목숨을 바쳤으나, 남한에서는 빨갱이라는 이유로, 북한에서는 우리 파가 아니라는 이유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하나 남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친일파든, 빨갱이든 그 타령이 그 타령이다. 공허하기 짝이 없다.

  그 누구보다 힘겹게 진짜로 싸운 이들이 한반도 양쪽에서 저렇게 버려지고, 저들보다는 치열하지 못했다 하나 민족진영의 정통성을 지닌 임시정부 요인들조차 민족진영을 자임하는 남한에서 저렇게 무참하게 뭉개지는 판국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이상한 질문이 떠올랐다.

   친일파와 빨갱이 중 누가 더 나쁜 놈일까? 좀 우스꽝스러운 질문이지만 저 위의 작은 사진에서 삿대질을 하며 싸우는 사람들은 따지고 보면 누가 더 나쁜가를 두고 싸우고 있을 뿐이다. 누가 더 나쁜 놈일까?
  
  한국을 멀리서 바라보다 보니, 별 생각을 다 한다. 해방 70년을 바라보는 지금, 분단상황이라면 도저히 빚어지지 않을 중년남성들의 저 싸움을 정리하기 위해 도움이 될 만한 책을 권한다. 나름대로 생각한 것으로다가...

    백범일지(김구)
   돌베개(장준하)
   세기와 더불어(김일성)
   최후의 분대장(김학철)
   아리랑(님 웨일스)   *괄호 안은 지은이

  이보다 더 좋은 책들이 틀림없이 나왔을테지만, 친일 문제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고전 중의 고전에 속하는 이 책들부터 먼저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친일파들을 때려잡는 것과 꼭 함께 해야 할 일, 그것은 빨갱이라는 색깔 때문에 독립운동 활동조차 지워진 이들부터 찾아내는 일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