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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살이

오노를 위한 변명, 그리고 몇몇 올림픽 종목에 대한 '내 멋대로' 관전평

(세인트 앨버트 = 김상현 가깝게 지내는 선배 댁에서 올림픽 경기를 몇 개 시청했다. 캐나다라는 한 나라의 명운을 짊어진 것처럼 여겨지는 남자 하키 준결승 캐나다 대 슬로바키아, 여자 컬링 결승, 숏트랙 몇 종목이었다. 

  • 숏트랙
"What a finish!" "What a wild, wild finish!" 

이런 멘트가 숏트랙에서보다 더 자주 나오는 경기도 없다. 결승선을 불과 10여미터 남겨두고 두 명이 한꺼번에 나동그라지는가 하면, 어젯밤처럼 1위가 삐끗해 금메달을 2등에 헌납하기도 하고, 자기편을 1등으로 만들기 위해 2위로 치고 올라오는 선수를 필사적으로 막는 추잡한 짓거리를 벌인 다음 금메달을 딴 동료 선수와 부둥켜 안고 '우승 세레모니'를 펼친다 (어제 중국 여자 경기에서 중국이 그랬다). 그 선수는 당연히 실격됐는데, 처음부터 예상한 일이었으므로 전혀 괘념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 추잡한 장면을 보면서, 나는 올림픽의 아름다운, 그러나 거짓이어서 더욱 공허하고 허탈한 구호를 다시금 떠올렸다. 선의의 경쟁, 정정당당. 개뿔...

오노가 이번에도 눈에 들어왔다. 500m에서 실격했지만 5000m 계주에서는 결국 동메달을 따내 미국 선수사상 가장 많은 메달(8개)을 획득한 선수로 더욱 확고히 자리매김 했다. 올해 숏트랙 종목에서 가장 운이 없는 선수로 꼽힐 성시백이 1위를 코앞에 두고 미끄러질 때, 나는 저 오노의 그 '나쁜 손버릇' - 나와 함께 TV를 본 선배의 표현 - 이 주범인가 궁금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가 돌연 그렇게 삐끗했던 것은 코너를 너무 빨리 돌아서였거나, 아마 고르지 못한 빙질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노는 결국 3위로 달리던 캐나다 선수를 밀친 '죄'로 실격했다. 성선수는 그래도 불행중 다행으로 넘어져 미끄러진 방향이 진행방향 그대로여서 2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한국에선 이 사태를 어떻게 보도했을까?' 궁금했다. 아니나다를까 '오노, 이번엔 제대로 걸렸다'라는 식의 보도, '잘코사니다!'라는 식의 반응이 주류이다. 

그렇다면 미국쪽 반응은? 채널을 돌려보니 마침 미국측 올림픽 주관사인 NBC가 그를 인터뷰하는 중이다. 오노의 답변은 이런 논조였다. "누구나 아다시피 숏트랙은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경기이다. 심판의 판정에 절대로 승복할 수 없지만, 헤이, 이런 게 숏트랙이다. 받아들여야지 어떡하겠는가. 릴레이가 하나 더 남았다. 최선을 다해볼 생각이다." 그리고 그의 실격을 판정한 이가 '캐나다' 심판이라는 점도 슬쩍 내비쳤다. 참 용의주도한 대답. 

나도 오노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인상도 별로고, 턱에 붙은 이른바 '소울패치' 수염도 꼭 쥐 같다. 게다가 경기에서 보여주는 '할리우드 액션'도 별로다 (할리우드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그는 '스타와 함께 춤을'이라는 프로에 나와 우승을 거머쥐기도 했다. 진짜 스타성이 있는 친구라는 얘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 사람들이, 그리고 한국 언론이 오노를 너무 '나쁜 놈'으로만 몰아 왔다고 생각한다. 다른 것 다 제쳐두고, 2002년 숏트랙에 나왔던 한국 선수중 이번 올림픽에 나온 선수가 한 명이라도 있는가? 마치 양궁처럼 한국의 숏트랙 선수층이 매우 두터운 대신 미국쪽은 그렇지 않아서일까? 아마 그럴지도... 하지만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올림픽 대표로 오노가 나올 수 있었던 게 얇은 선수층 때문만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할리우드 액션'이 늘 먹혀서? 나는 결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스스로를 가혹하게 채찍질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가 뛰는 그 종목을 사랑해야 한다. 오노는 인터뷰할 때마다 두 가지를 꼭 언급한다. "숏트랙이 원래 변수가 많아"와, "나는 정말 숏트랙이 좋아 I love this game'이다. 한국의 숏트랙 선수중 이렇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모든 선수가 그렇게 대답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 하키
어차리 인생이 불공평한 것이고 스포츠도 예외가 아니라지만 프로선수들이 득세하는 이런 식의 경기를 올림픽에 넣어야 할까, 하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하긴 아마추어들로만 꾸린 과거 경기에서도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의 전력은 사실상 프로 수준이었다. 마치 과거 아마추어 야구 선수권 대회가, 사실상의 프로들인 쿠바의 독무대였던 것처럼. 

선수들의 면면을 보니 거의 다 북미하키리그(NHL)에서도 내로라 하는 스타플레이어들이다. 미국은 핀란드를 6:1로 박살내면서 무패의 전적으로 결승에 진출했고, 캐나다도 약간의 우회로를 거치긴 했지만 독일과 러시아, 슬로바키아를 연파하고 일요일 숙명의 금메달전을 펼치게 됐다. 여기에서 캐나다가 지면 과연 어떤 반응이 나올지, 자못 걱정스럽다. 인도의 크리킷 집착, 미국의 미식축구 집착, 영국의 축구 집착도 이 정도는 아닐 터이다. 2002년 월드컵때 한국에서 보였던 축구 열기를 고스란히 캐나다로 옮겨놓으면 비슷한 수준이 될까? 아마도.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열기가 4년마다가 아니라 해마다 재연된다. 하키 하키 하키... 하키로 날이 새고 진다. 

  • 컬링
하드! 하아드~! 하아아아아아아아드!!! 컬링을 보면 예외없이 들리는 함성. 하지만 올림픽에서는 그 단어가 각기 다른 나라 말로 표현되어 제대로 챙겨(?) 듣지 못했다. 이 말은 돌을 던진 - 던졌다기보다는 민 - 사람이 비질하는 이들에게 던지는 주문이다. 말 그대로 세게(hard), 세게, 아주 세게 비질을 해서 돌의 진행 거리나 방향을 조금이라도 바꾸라는 주문이다. 흔히 성적 농담과 연결되기도 하는 단어여서 보는 이들을 슬몃 웃음짓게도 하는 외침이다. 

컬링이 얼핏 볼 때 느껴지는 코믹함과는 별개로, 실은 대단한 집중력과 운동 신경, 용의주도한 전략전술을 요구하는 고도의 심리전임을 어젯밤 여자 결승 경기가 생생하게 입증했다. 6 대 6의 팽팽한 접전은 11회 연장전에서 결정되었는데, 뒤에 돌을 던지는 캐나다가 훨씬 더 유리한 입장이었는데도 스웨덴의 용의주도한 전술에 밀려 돌 하나 차이로 패하고 말았다. 

토요일 오후에 열린 남자 컬링 결승에서는 비교적 큰 드라마 없이 싱겁게 캐나다의 승리로 끝났다. 2002년 의외의 역전패로 은메달에 머물렀던 케빈 마틴 팀으로서는 8년 만의 설욕인 셈. 당시 케빈 마틴 조를 꺾고 금메달을 안았던 그 주인공이 이번에는 노르웨이 팀의 코칭 스탭으로 왔다. 

컬링 경기보다 도리어 더 눈길을 끌었던 것은 노르웨이 팀의 '골 때리는' 유니폼 패션. 빨간색과 군청색, 흰색을 바둑판처럼 배열한 그 바지가 특히 가관이었는데, 말로는 골프 패션이라고 하나, 내 눈에는 파자마 바지처럼 보였다 (사진). 세상에나, 어떻게 저렇게 황당한 복장으로....!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그 유니폼이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급조 미신에다, 패션에 대한 구미가 엽기적인 네티즌들의 성원에 힘입어 도리어 큰 인기라는 것.

캐나다 팀에 노르웨이 팀의 복장에 대한 촌평을 묻자, "유럽 스타일", "흥미로운 복장", "나이스한 노르웨이 팀원들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패션" 등등의 점잖은 코멘트가 돌아왔다. 혹시 캐나다 팀도 그런 복장으로 바꿀 용의가 있느냐는 질문에는 이구동성으로 "노!"

사족: 김연아의 향후 거취가 벌써 화제다. 나는 이것이 제발 악몽이거나, 썰렁한 농담이기를 바란다. 나이 스물이다. 그런데 벌써 은퇴라고? 이곳 언론은 이구동성으로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의 경쟁이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다음 소치 올림픽이 정말 기대된다는 한 해설자의 다소 섣부른 흥분까지 있었다. 

그런데 벌써 은퇴라고? 제발 이러지 말자. 그리고 왜 운동과 공부가 병행이 안되는가? 미국 대표로 나온 레이철 플랫의 경우를 보라. 나는 김연아가, 아니 한국의 많은 스포츠맨이 제발 조로하지 말고 좀더 운동에 전념하기 바란다. 이번에 메달만 따면 내 인생 꽃핀다, 라는 식의 마인드셋을 심어놓은 한국 엘리트 스포츠와, 한국 역사에 유구한 치욕스런 당쟁을 연상시키는 체육계의 파벌이 사라지기를 제발 바란다 (백일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