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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문학

뉴욕에서 SM타운 공연을 보다


   지난 일요일 뉴욕에 다녀왔습니다. SM타운의 가수들이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공연을 한다기에, 딸과 둘이서 자동차를 몰아갔습니다. 공연은 10월23일 오후 7시부터 예정되어 있었는데, 오후 들어 맨해튼 32가 한인타운과 매디슨 스퀘어 가든 주변은 K팝 팬들로 북적댔습니다.

 
  요즘 새로 생긴 모임의 이름을 플래시몹이라고 한답니다. 온라인에서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끼리 바깥에서 만나 갖는 행사입니다. 공연이 열리기 전 매디슨 스퀘어 가든과 32가에서 플래시몹 거리 공연이 펼쳐졌습니다. 음악 소리는 아주 작았으나 거리에서 노래하며 춤판을 벌이는 모습은 공연 직전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다름아닌 뉴욕의 중심부에서 한국 음악이 이렇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줄은 몰랐습니다. 놀라운 광경입니다.

 
  K팝 공연을 보러온 소녀들 중에 이렇게 태극기를 들고온 팬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예전에 아무리 팝스타를 좋아해도 성조기나 유니언잭을 흔든 적은 없었는데, 요즘은 이렇게 국기를 흔드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태극기도 나왔지만 팬들은 자기 나라 국기 또한 들고 흔들었습니다. 캐나다 국기를 몸에 두른 소녀를 보았고, 브라질 팬은 자기네 국기를 무대의 슈퍼주니어에게 전해 흔들게 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열광적인 팬이 이렇게 많다고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길거리에 스타가 나타난 것도 아닌데 이토록 열광적입니다. 카메라맨들이 포즈를 취재달라고 하자 순식간에 팬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의 티셔츠를 입고 온 팬들이 많았고 플래카드를 들고온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보시다시피 동양인은 별로 눈에 띄지 않습니다. 언뜻 보기에 10%도 되지 않습니다. 한국 팬들이 "우리 음악인데…" 하고 뻐길 법도 했으나, 다른 팬들이 워낙 기세등등하여 오히려 위축되는 모습입니다. 비가 공연할 때 대부분 동양권 팬이었던 것에 비하면, 몇년 만에 K팝이 엄청난 속도로 파급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매디슨 스퀘어 가든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는데, 표를 구하기 위한 줄이 아니었습니다(티켓은 온라인에서 발매하자마자 1시간만에 매진. 유료 좌석 1만5천석). SM에서 공식적으로 파는 기념품을 사기 위한 줄이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SM에서 허가를 받지 않은 기념품을 파는 한국인 '잡상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공연장에서 흔들 스틱을 10달러에 팔았습니다. "여긴 왜 이렇게 단속이 심해?" 하고 불평해가며….


  공연을 기다리다가 매디슨 스퀘어 가든 앞에서 만난 팬입니다. 대만 출신으로 작년에 보스턴에 있는 이스트노던 대학 대학원에서 커뮤니케이션비지니스를 공부하는 李軒衛라고 했습니다. 대만에 있을 때부터 K팝에 빠졌고 공연을 여러번 보았다고 했습니다. 뉴욕 공연을 보기 위해 버스를 타고 왔습니다. 왜 좋으냐고 물으니 "좋은데 무슨 이유가 있어야 하나?"라고 반문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좋아했는지 한국말도 곧잘 했습니다.



  팬들은 서로를 궁금해 하는 편이었는데, 첫 질문은 주로 "어디서 왔느냐?"였습니다. 토론토에서 10시간 운전해 가는 것은 명함도 못내밀 정도입니다.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15시간,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에서 버스로 24시간 달려온 팬도 있었습니다. 백인 소녀들이었습니다. 죽자 하고 달려 왔으니, 죽으라 하고 공연에 열광했습니다. 히잡을 몸과 얼굴에 뒤집어쓰고 눈만 내놓은 채 "오빠, 사랑해요"를 외치는 두 소녀를 보았습니다. 신기했습니다.



드디어 공연 시작입니다. SM타운의 공연 로고가 무대 중앙에 선명하게 박히면서 시작됩니다.


 에프엑스 샤이니 강타 소녀시대 슈퍼주니어 보아 동방신기 등 SM의 가수들이 총출동했습니다. 

 
  에프엑스가 의외로 공연을 잘 했습니다. 샤이니는 <뉴욕타임스>에서 극찬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그래도 우리 눈에는 대표선수가 소녀시대와 슈퍼주니어였습니다.
  소녀시대는 깔끔한 이미지와 화려한 군무를 자랑했습니다. 슈퍼주니어는 예성과 규원, 려욱의 가창력이 좋아보였습니다. MR로 하는 라이브였으나, 연주까지 현장에서 이루어졌더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댄스그룹이 립싱크 하지 않는 모습은 대견해 보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멀리서나마 제시카를 직접 볼 수 있어서 거의 감격…. 나는 제시카의 팬입니다.


  
   공연이 3시간이 넘어가자 조금 지루해졌습니다. 갑자기 동방신기가 등장하자 공연장 분위기는 다시 뒤집어졌습니다.  동방신기 2명은 능력을 120% 발휘했으나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습니다. 실력자 3인이 JYJ로 빠져나간 상태로, 5명이 하던 퍼포먼스를 2명이 소화하려 하니 힘에 부치는 모습을 자주 연출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팬들은 열광했습니다.
  슈퍼주니어는 7명밖에 무대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스케줄이 겹쳐서 시원이 같은 애들이 무대에 서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7명이, 게다가 가창력 3인방이 건재하니 공연에는 지장이 없었습니다.



  자, 문제의 보아입니다.

  나는 이번 공연 이전까지 보아를 잘 몰랐습니다. 무슨 음악을 어떻게 하는지,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도 몰랐고 그저 한류의 한 축을 이끄는 여가수쯤으로 알았습니다. 이번에 보아가 노래하는 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유튜브로도 본 적이 없으니, 보아는 내게 그야말로 생짜였습니다.

  보아는 이번에 왜 보아인가를 알게 해주었습니다. 소녀시대 에프액스 슈퍼주니어 샤이니 등 그룹의 무대보다 보아 한 사람의 무대가 훨씬 무게감이 있었습니다. 다른 가수들은 퍼포먼스 위주라면, 보아는 유일하게 음악을 했습니다. 청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는 무시무시할 정도였습니다. 아티스트의 기가 차고 넘치고 강력할 때, 장르를 불문하고 그것은 보는 이들에게 그대로 전해집니다. 
  그런 점에서, 보아는 이번 공연의 종합선물세트에서 빼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미국 무대에 데뷔한 지 3년 정도 되었으니, 조금 더 준비하여 단독 콘서트로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더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어도 수준급이었고 관록의 스타답게 농담도 잘 했습니다. 바지가 짧아 자꾸 내려야 한다는 둥, 남자들이 음악은 안듣고 다리만 쳐다보는 것 같아 신경쓰인다는 둥... 
 
  보아는 K팝 스타들 중에서도 급이 다른 중량급입니다. 집에 와서 유튜브를 찾았는데, 공연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소녀시대 슈퍼주니어의 공연은 유뷰브를 확대한 느낌인 데 반해, 보아는 무대에서 확실하게 공연한 수퍼 뮤지션입니다. '보아를 사랑합시다! 보아를 이런 식으로 소모시키지 맙시다!'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한국에서는 K팝이 거품이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된다고 들었습니다. 거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으나, 현지에서 내가 느끼는 것은 대단한 열기입니다. 뉴욕과 매디슨 스퀘어 가든이라는 상징성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미주 지역 어디에 던져놓아도 관객은 모이고 열광합니다. 이것을 거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계는 있을 수 있습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음악에 좀더 치중해야 한다는 것, 종합선물세트가 아니라 선물 각각이 각개전투를 벌여야 한다는 것,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 등등의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파리와 뉴욕의 공연이 엇비슷한 것은 이번 한번으로 족합니다.

  특히 보아는 이제 저런 식의 끼워넣기를 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보아를 선물세트에 넣어두기에는 너무 크고 아깝습니다.

  내가 보기에, K팝 뉴욕 공연은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북미 지역 팬들의 입맛을 어떻게 충족시켰을까를 생각해보니,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잘 맞아떨어진 듯합니다.
  소프트웨어라면, 어릴적부터 연습생으로 훈련해온, 잘 훈련된 가수들을 이곳에서는 찾기 어렵고, 더군다나 요즘에는 유명 팝 아이돌 그룹을 보기 힘듭니다. K팝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로 이곳의 팬들은 '깨끗함'을 꼽습니다. 일반 팝이 술과 파티, 마약 같은 칙칙하고 어두운 내용을 많이 담고 있는 반면, K팝의 사랑이야기는 풋풋하고 깨끗하고 순정만화를 보는 듯합니다. 만화 캔디나 순정소설에 빠지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드웨어 측면에서도 K팝만큼 수혜를 많이 입은 장르도 없습니다. 온라인을 통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세상에 K팝이 등장했습니다. IT가 만들어내는 세상에 한국만큼 빨리 앞서가는 나라도 드뭅니다. K팝보다 조금 앞서 인기를 모았던 J팝은 온라인의 다다매체 시대의 혜택을 조금도 누리지 못한 반면, K팝은 온라인이라는 공공의 하드웨어를 사유화하다시피 했습니다. 웬만한 뮤직비디오는 수천만회의 조회수를 기록합니다. 
 

  이번 공연에서도 그 위력은 발휘되었습니다. 과거 같으면, 뉴욕 공연한다고 신문 방송에 광고내고, 거리에 포스터 붙이고 했을 것입니다. 몇년 전 JYP 공연 포스터를 맨해튼 32가에서 본 적도 있습니다. 지금 보면 그것은 아주 전근대적인 방식입니다. 신문에 기사 한 줄, 쪽광고 하나 내지 않아도, 거리에 포스터 한 장 붙이지 않고도 공연 티켓이 1시간 만에 매진될 정도입니다. 공연자와 팬들을 매개하는 매체가 신문방송에서 온라인으로 순식간에 달라졌으며, K팝은 그 물결에 가장 먼저 올라타, 그 물결을 조종해가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습니다.

  뉴욕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만큼 이제 온오프라인 하드웨어를 만드는 데는 일단 성공했다 싶은데, 앞으로 그 내용을 어떻게 채워갈 것인가 하는 것이 K팝의 롱런을 좌우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