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처음 커피를 마셨다.’ 한국 커피사의 첫 문장은 으레 이렇게 시작한다. 근거도 출처도 없는 사실이 신문 잡지와 책자에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어느덧 정설 노릇을 하고 있다. 최근 그보다 오래된 ‘기록’이 발견되었다. 박종만 ‘왈츠와닥터만 커피박물관’ 관장이 발굴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커피는 아관파천이 일어나기 13년 전인 1883년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 1882년 고종은 외교사절단 보빙사를 미국에 파견했는데, 그 일행을 안내하고 조선에 함께 돌아온 퍼시벌 로웰이 작성한 문건에 커피 이야기가 나온다. “궁중에 초대되어 조선의 귀한 수입품인 커피를 대접받았다.” 얼마 전 박 관장은 자료가 전하는 최초의 다방도 발견했다. 1913년에 문을 연 서울 ‘남대문역 다방’이다.

   
ⓒ시사IN 백승기
박종만 관장이 직접 설계한 왈츠와닥터만(위)에서는 북한강 풍경을 만끽하고 공연예술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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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삼봉리 272번지는 북한강변이다. 대도시 중심으로 보면 퍽 외진 곳이어서, 여기까지 커피를 마시러 올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찾아온다. 왈츠와닥터만은 커피 전문점(혹은 레스토랑)일 뿐 아니라, 커피를 기반으로 하는 문화예술의 거점이기 때문이다. 커피를 마시며 북한강 풍경을 만끽하고, 역사를 만나고, 공연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좋은 커피와 분위기만을 제공하는 전문점이라면, 한국 커피의 뿌리까지 일부러 찾아 나설 필요도, 이유도 없을 터이다.

나는 커피 전문가 박종만씨를 만나러 갔으나, 그는 커피박물관 관장으로 나타났다. 명함에도 ‘대표’ 대신 ‘관장’이라 박혀 있었다. ‘커피에 미친 남자’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그는 커피점에서 시작해 커피 볶는 공장과 레스토랑에 이어 커피박물관·콘서트홀까지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이곳을 ‘커피 왕국’이라 부른다. 왈츠와닥터만은 왕국답게 지난 15년 동안 지리적 변방이던 곳을 커피와 어울리는 문화예술의 한 중심지로 만들어냈다.

커피와, 커피를 둘러싼 자연·문화예술 환경은 서로에게 긴밀하게 영향을 끼친다. 맛을 추구하다보니 커피 문화에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되고, 그 관심은 세계 및 한국 커피의 기원과 전파 과정을 찾아가는 ‘탐험’으로 이어졌다. 실제 박 관장은 커피 탐험대를 꾸려 2007년 아프리카를 시작으로 아랍·유럽·브라질 등을 해마다 방문하는 커피 문명 탐험을 해오고 있다. 올해에는 인도를 찾을 참이다. 많게는 네 명으로 구성하는 대원들 탐험 비용은 커피박물관이 모두 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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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관련 유물도 2000점을 보유하고 있다.

아프리카·브라질 등으로 매년 커피 문명 탐험 떠나


이곳에 자리를 잡은 지 10년이 지난 2006년에 커피박물관을 개관하면서 그는 “처음으로 부끄러웠다”라고 돌이켰다. 우리 커피 문화에 대한 이해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고종이 처음으로 커피를 마셨다 카더라’만 난무했다. 그 자각을 바탕으로 그는 30~40명에 이르는 대원을 이끌고 여름이면 전국의 커피 유적지를 찾았다. 기록은 없으나 최초의 커피점을 가졌을 법한 한국의 첫 호텔 ‘대불’의 흔적을 제물포에서 더듬는가 하면, 전통의 명맥을 유지하는 시골 다방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그는 ‘100년 된 커피집이 스타벅스와 나란히 있어야 하는데, 왜 우리에게는 없을까’ 하는 아쉬움이 컸다. 커피와 관련한 이런저런 탐사와 행보가 왈츠와닥터만 커피의 질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리 없다.

1989년 일본 출장길에 우연히 보게 된 커피회사 왈츠의 커피 볶는 공장 풍경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었다’. “연기 속에서 할아버지들이 뛰어다니며, 웃으며 일하는 광경이 마치 별천지 같았다”라고 박 관장은 말했다. 당시 그는 꽤 괜찮은 인테리어 회사를 운영하는 나이 서른의 CEO였다. 직업을 바꾸었다. 그는 서울 홍대 앞에 ‘왈츠’라는 커피 전문점을 열고 정통 커피 맛을 대중화하는 데 일조했다. 

틈만 나면 세계 곳곳을 누비며 커피를 체험하던 그는 1875년 문을 연 프랑스 파리의 유명한 카페 ‘드 마고’(Les Deux Magots)를 만났다. 사르트르와 보바르가 토론하며 글을 썼다는 자리가 온종일 예약되어 있는 광경은 큰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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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만 왈츠와닥터만 커피박물관 관장은 “왜 우리는 100년 된 커피집이 없을까” 하는 생각에 커피의 뿌리를 찾아 나섰다.
충격은 ‘드 마고처럼 자랑할 만한 커피 문화’ ‘100년 가는 커피집’을 만들자는 꿈으로 이어졌다. 1996년 본인이 직접 설계해 지은 왈츠와닥터만은 그 꿈의 출발이었다. 그는 고급 커피를 중심으로 한 레스토랑에, 커피와 어울리는 문화예술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단층 건물을 3층까지 올려 박물관을 만들었다. 국내외에서 20년 넘게 수집해온 커피 관련 유물 2000점을 보유한 박물관은 상설 전시 외에도 1년에 두 번씩 특별전을 연다. 3층 온실에서는 커피나무가 자란다. 박 관장은 15년째 한국의 토양에 맞는 종을 개발해왔는데, 요즘은 4대째 나무가 자라고 있다. 

박물관 안에 설치된 콘서트홀에서는 매주 ‘닥터만 금요 음악회’를 열고 있다. 올해 1월21일 열린 <피아니스트 박민경 초청연주회>는 제239회 음악회였다. 한 무대에서 매주, 국내 정상급 연주자들이 5년 넘게 공연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보기 드문 일이다. 

박 관장에게 “왈츠와닥터만의 커피는 어떤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는 “커피 회사 대표가 아닌 박물관장으로서 우리의 지향점을 이야기하면”이라며 말머리를 꺼냈다. “커피 볶는 이들이 자기 기준을 가지고 하는 것이 영 마뜩지가 않다. 커피 산지에서 주민들이 내는 커피의 이상적인 맛, 바로 그것에 다가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커피란 무엇인가”라고도 물었다. “매일 만나는 변하지 않는 오랜 친구”라는 답이 금방 돌아왔다. 박 관장은 그 친구를 위해, 친구를 활용해 문화예술 왕국을 계속 건설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