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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이야기

황당한 원고 청탁



  (토론토=성우제) 한국에서 가끔씩 원고 청탁을 받습니다. 주로 잡지에서 해오는데 최근 들어 당황스러운 경우가 부쩍 많이 생겨납니다. 기자로 일할 때, 원고 청탁을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로 많이 했던 터여서, 나도 예전에 이렇게 황당한 일을 만들지는 않았을까 되돌아보기도 합니다.

 아무리 돌아보아도, 상식선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상식선에서 벗어날 일이 없었던 것이 필자에 대한 예의는 매체 종사자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토론토 이민사회에서 놀라운 일 가운데 하나는, 각종 한인 매체들이 고료를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료를 주지 않는 것이 일반화했고 아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전문적인 글쟁이가 극소수에 불과한 데다 고료를 받기는커녕 돈을 주면서 실어달라고 하는 이들이 많아서 그런지, 이같은 문화가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누구의 부탁을 받아 두번쯤 이곳의 신문에 글을 준 적이 있는데 고료는커녕 "고맙다"는 인삿말 한 마디 듣지 못했습니다.

  이런 황당한 문화가 한국으로 옮겨간 것이 아닌가 잠시 착각하게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엊그제 한국의 어느 일간지에서 발행하는 어느 매체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았습니다. 원고 청탁을 받을 때 가장 궁금하기도 하지만 내놓고 말하기가 쑥스러운 부분이 바로 고료입니다. 따로 취재가 필요한 일이 아니고 하여, 간단한 이력과 더불어 반쯤 승락하는 답을 보내면서 "고료는 장당 얼마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과거 원고를 청탁할 때 "고료는 (원고지) 장당 얼마입니다"라는 말을 반드시 적었는데, 청탁자가 그것을 빠뜨렸으니 내가 물어볼 수밖에...

  답이 왔습니다. 눈을 의심했습니다. 장당 2,500원. 처음에는 25,000원인 줄 알고 "꽤 괜찮은 걸?" 하면서 1~2초간 흐뭇해 했습니다. 10매를 청탁하니 총 25,000원이라고 합니다. 하하.

  다른 제안이 있었습니다. "고료를 받지 않으신다면 우리 잡지를 10부 보내드리겠다." 그래도 서울에서 발간되는 중앙 일간지의 자매 주간지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게재 여부는 데스크가 최종 결정을 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릴지 말지 모르지만 일단 써서 보내라, 게재 여부는 글을 보고 판단하겠다,  게재되면 고료는 장당 2천5백원. 웃음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선수는커녕 아마추어에게도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면서 잡지를 만든다고 합니다.

  1989년 창간할 당시의 시사저널 고료가 장당 1만원이었습니다. 전문 글쟁이가 아니어도 일단 글이 게재되면 1만원을 지급했습니다. 무려 20년 전에 그랬습니다.
  
  요즘 드문드문 들어오는 청탁 고료의 마지노선이 1만원입니다. 그런데 2천5백원에, 게재 여부 또한 글을 보고 판단하겠다는 내용이 원고 청탁서라고 날아옵니다. 그 신문사의 그 데스크는 무슨 배짱으로 잡지를 만들겠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고료는 그렇다 치고 반듯하게 예의를 갖추어 원고 청탁하는 것도 가르치지 않았으니, 책의 수준은 보지 않아도 훤히 보입니다.

  최근 모방송사의 PD와 메일을 주고 받았는데, 참 반듯하고 예의 바르게 질문을 해왔습니다. 내가 보기에, 이런 태도가 정상이고 상식입니다. 한국과 가끔씩 접촉하면서 이런 정상과 상식을 만나는 것이 오히려 드뭅니다. 

  원고를 받아놓고 뭉개다가, 게재가 예정된 호를 지나 "다시 써달라"면서 그 무례를 "그게 뭐 대수냐"고 하질 않나,  "문제가 있다면 받자마자 연락하지, 왜 방치해뒀다가 이제 와서 연락하냐"는 항의에는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구는거냐?"고 하질 않나... 보낸 원고가 잡지에 게재되었는지 어떤지, 고료는 보냈는지 어쨌는지 감감 무소식인 경우도 있습니다. 어렵게 연락을 하면 "아직 안갔아요? 다시 보내라고 할께요" 하고 답하지만 또 감감 무소식입니다. 예전 같으면 쫓아가서 요절을 내버릴 일이지만 멀리 떨어져 살다보니 쫓아갈 수도 없습니다. 언론 장사, 미디어 장사는 결국 사람 장사인데 장사 밑천들을 이렇게 함부로 다루면서 무슨 장사를 하겠다는 것인지, 옷장수 처지에서 보아도 참 답답합니다.

  한국이, 세상이 참 많이 변했다 싶습니다. 

  원고를 보냈다가 이상한 일 혹은 봉변을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니, 글쓰기 자체보다는 원고를 둘러싸고 생겨날지도 모르는 예상 밖, 상식 밖의 일이 더 두렵습니다. 세상이, 한국이 아무리 변해도 지켜야 할 것은 반드시 지켜져야 할텐데, 무례가 상례로 변해가는 모습이 참 무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