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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이야기

'아이리스', 왜 맥빠지나 했더니...



  (토론토=성우제)  아이리스가 한참 재미있을 때는,  수요일이 기다려졌었다. 소설이 재미날 때 마음이 설레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는 거의 실시간으로 한국의 모든 방송을 볼 수 있으니, 텔레비전 시청에 관한 한 한국과 외국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아이리스가 광화문 총격 장면의 분수령을 넘어 새로운 국면의 절정에 가까워진 오늘, 갑자기 맥이 확 빠졌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번째 이유는 주인공 역할을 맡은 이병헌이다. 이병헌은 아다시피 최근 20대 초반의 캐나다 우리 동네 출신 여성과의 고소 스캔들로 (이병헌 입장에서 보면) 곤욕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 어느 스포츠 신문 기사를 보니 고소 스트레스와 촬영 때문에 밥도 못 먹고 잠도 자지 못해 힘들어 한다고 했다. 그 신문의 논조에 따르면 이병헌은 고소 사건의 피해자이다.

  극중에서 김현준은 참 선이 굵고 사내답다. 아이리스의 킬러 탑을 잡았을 때, 자기 총을 버리고 맨손ㅡ으로 맞짱 뜰 자세를 취한다. 그리고는 소녀를 죽이고, NSS 동료를 죽인 죄를 벌하기 위해 쌍팔년 식으로 '정의의 주먹'을 날린다. 배우가 연기를 하는 것일 뿐인데 그 사내다움이, 전혀 사내답지 않은 현실의 이병헌 모습과 자꾸 오버랩되면서 혼란이 일었고 급기야 맥이 탁 풀리게 했다. 

  최승희가 아이리스와 관계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최승희에게 그 사실을 먼저 말해준다. "네 입에서 다른 소리가 나올까 봐 두려워서 그런다"는, 아, 진짜 사나이이자 최고의 남친다운 면모! 어쩌면 이렇게 섬세한 배려까지??? 바로 이 멘트가 이병헌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더라면 나도 저 멋진 멘트를 다음에 반드시 써먹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병헌의 입에서 그 소리가 나오자, 푹, 하고 웃음이 터졌다. 

  현실에서의 이병헌은 "아름다운 추억" 어쩌고 하는, 내가 알기에 선수들이 아주 즐겨쓰는 말을 했다.  그에게는 그토록 아름다운 추억이, 그와 잠시나마 사귀었던 20대 초반의 어느 여성에게는 지금 '씻지 못할 악몽'이 되고 있다. 이유와 배경이 어떠하든 간에... 

  아름다운 추억을 말하는 그의 입은, 나에게 참 추악해 보였다. 한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기고 싶은 일이고, 그 추억을 함께 만든 다른 당사자에게는 악몽이 되어 고소까지 간 형국인데, 이게 어디 말이 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또한 그 추억만들기의 당사자 가운데 한 사람에게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진하고 싶은 것이 된다면, 그 말 한마디 만으로도 이번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누구인지 쉽게 확인 할 수 있다.

  그런 그의 입에서 "네 입에서 다른 소리 나올까 봐 두려워" 먼저 말을 하는 배려가 나오니 웃음이 날 밖에... 한때나마 사귀었던 어린 여성, 협박을 받았든 어쨌든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함께 라스베이거스 여행도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사람'에게는 왜 저런 배려를 못하냐고 묻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일 수는 있다. 

  불현듯 든 생각은 '병헌씨, 김현준 10분의 1만이라도 닮아라'였다.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었으면 두 사람 모두에게 아름다운 것으로 간직되도록 잘 마무리 할 것이지, 나잇살이나 먹어서 그 어린 전 애인에게 저런 꼴을 당하는 게 부끄럽지도 않은지... 이런 내용이 자꾸 오버랩되니 맥이 빠질 수밖에...

  두번째 이유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시나리오가 말도 안되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류의 삼류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최승희의 아이리스 설이, 원작 때문에 무수하게 떠돌았고 제작자측에서 어떤 시나리오를 내놓을지 궁금했었다. 최승희의 고백을 듣는 순간 맥이 탁 풀렸다. 아이리스가 참 단순하고 순진한 조직이구나 하는 생각 때문에... 

  백산은 현준에게 금단의 열매를 먹었다는 이야기를 자꾸 한다. 최승희가 왜 금단의 열매인데?(씨바), 백산이 최승희를 사랑했나? 백산이 사랑했다고 금단의 열매인가? 아이리스가 키운 최승희여서? 그런데 왜 최승희는 거절하나? 사랑 때문에??? 도대체 납득이 되지 않는 시나리오이다. 시나리오를 떠나, 현준은 이런 최승희도 믿고 감싸주는데, 왜 이병헌은 애인을 감싸주지 않나 하는, 현실과 가상이 뒤죽박죽이 된다.

  아무리 허구라고는 하지만 한국처럼 치안이 잘 되어 있는 곳에서 백주대낮에 중무장을 한 테러범들이 설치고, 청와대 비서실장이 암살당하고, 대통령 비서가 스파이라는 것까지... 어처구니없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이건 삼류를 넘어 막장 시나리오라고 볼 수 있겠는데, 막장 중의 막장은 최승희의 고백이었다.

  막장 삼류 시나리오로 떨어진 아이리스를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게 하는 것은 다름아닌 스케일이과 총싸움이다. 다름아닌 돈질이다. 이런 삼류 시나리오에 돈을 퍼부은 게 삼류고, 이런 드라마에 넋을 잃은 내가 삼류다. 씁쓸하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