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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이야기

이렇게 맛있는 커피는 처음 먹어본다


  지난번 한국에 갔을 때 어느 분이 미국의 스텀프타운커피로스터스(Stumptown Coffee Roasters
)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미국 서부에서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커피 회사인데 커피의 역사, 나아가 음식 문화의 역사를 바꿔나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과장이 좀 심한 것 같은데?"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난 주말, 뉴욕에 갈 일이 있어서 말을 들은 김에 그 커피점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맨해튼의 버스 터미널에 새벽에 도착했던 까닭에, 시간이 좀 남기도 했거니와 20분만 걸으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스텀프타운커피로스터스는 맨해튼 29가 18W에 있습니다. 눈에 금방 띄지는 않았습니다. 스터벅스처럼 초록색 상징물 같은 것도 없고, ACE라는 그렇고 그런 평범한 호텔의 1층에, 간판도 없이 유리에 가게 이름을 적어놓아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토요일 아침 7시30분이라면 꽤난 이른 시간입니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커피점답게 향기가 훅~ 하고 밀려왔습니다.




  커피점 안에는 위에 보이듯 주방만 있고 앉아서 커피 마시는 의자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커피를 사들고 바깥으로 나가거나, 문을 열고 들어가 호텔 로비에 앉아서 마시게끔 되어 있습니다. 호텔 로비는 커피점과 와인 칵테일 바와 자리를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인터넷이 가능하여, 낮에 한번 더 갔더니 앉을 자리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바리스타의 모습이 우선 인상적입니다. 위에 보이듯 모두 모자를 쓰고, 남자들은 살짝 구렛나루를 길러서 남미풍을 드러냅니다. 옷은 1930년대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올드 패션입니다.

  더 인상적인 것은 줄을 선 손님들입니다. 스타벅스나, 토론토의 팀호튼스 같은 대중적인 커피점에서 가장 큰 문제는 시간과의 전쟁입니다. 얼마나 빨리 손님 줄의 길이를 줄이느냐가 연구 과제이자 돈을 버는 관건입니다. 오래 줄을 서면 누구나 짜증이 납니다.

  그러나 스텀프타운커피는 달랐습니다. 바리스타는 느긋하게 만들고, 손님도 느긋하게 기다렸습니다. 명품이라 여기면 모두 느긋해지는 모양입니다. 에스프레소를 베이스로 하는 카푸치노를 만드는 데 4~5분은 기다려야 했고, 나는 일반 커피를 시켰는데 그마저도 3분 이상이나 걸렸습니다. 

  일반 커피는 커피를 갈아서 프랜치프레스라 불리는 기구를 이용해 뽑아주었습니다. 맛이 구수하다는 느낌을 가졌을 뿐 "대단하다"는 느낌은 갖지 못했습니다. 오후에 다시 들러 에스프레소를 맛보았는데 "좋군" 정도의 느낌이었습니다.


 
 

위의 진열대에서 커피를 한 봉지 샀습니다. 에스프레소와 함께 사서 가격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으나 비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모두 합쳐 13달러쯤 들었나?

  내가 산 커피는 하우스블랜드였고,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 커피를 섞은 것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향에 대해서는 꽃향기와 볶은 호두 향이 성숙한 과일 향과 만나고, 달콤하고 바싹 태운 끝맛이 난다나, 어쩐다나 하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또한 산지와 직거래를 했다는 로고와 함께 블랜딩을 통해 다양하고 풍부한 맛을 낸다는 상투적인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돌아오는 내내 가방 안에서 커피 냄새가 풍겨도 신선한 커피라 그렇겠거니 했습니다. 집에 와서 주전자로 내려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마셔온 커피와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제대로 해보자 마음 먹고, 이민 온 후 처음으로 온도계까지 끄집어냈습니다. 물 300cc에 커피는 20g을 갈았습니다. 1인분으로는 내리기 어려우니 2인분을 내렸습니다. 끓는 물이 95도쯤으로 식었을 때, 주전자로 재빨리 드립퍼에 물을 부었습니다. 커피를 내리는 시간은 1분 정도 걸렸습니다.

 서버에 내려온 커피를 잔에 옮겼을 때 온도는 80도를 웃돌았습니다. 잔은 급격한 온도 저하를 막기 위해 미래 덥혀 두었습니다.

 "와~"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올 만큼의 대단한 맛이었습니다. 커피콩의 크기는 작았고, 볶기는 중간 정도였습니다. 본래 중간 정도 볶기에서는 신맛이 많이 나서, 나는 그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신맛이 이렇게 좋구나 하는 것을 처음 경험했습니다. 신맛 안에 단맛이 풍부하게 들어 있고, 그 단맛은 오래 오래 입안에 남습니다. 커피가 입에 들어올 때마다 '아, 맛있다'는 소리를 절로 내게 됩니다. 이 맛을 묘사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신맛과 단맛이 섞였을 때의 고급스러운 그 맛.

  두번, 세번 더 내릴 때마다 감탄을 거듭... 혼자 먹기가 아까울 지경에 이르러, 커피를 좋아하는 어떤 분께 들고가 함께 마셨습니다. 커피 봉지를 열 때부터, 커피를 내리고, 입안에 들어간 뒤 그 뒤에 남는 향에 이르기까지 지금껏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맛과 향을 냈습니다. 신맛이면서도 달콤하고, 가벼운 듯하면서도 묵직한 느낌을 주는 신통한 커피였습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설명을 보니, 산지에 가서 가장 좋은 커피를 직접 골랐다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하는 것이지만 직접 고르는 거기에 노하우가 있지 않을까, 좋은 커피를 알아보고 남다르게 비용을 지불하지 않았을까, 인내심을 가지고 좋은 커피가 생산될 때까지 특정 지역에서 기다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커피를 구하는 것은, 정보 지식 비용 인내심까지 필요로 하는 지난한 과정입니다.

  좋은 커피를 구한 다음, 볶는 과정에서 가장 좋은 맛을 뽑아내는 볶기를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스텀프타운 커피의 맛을 결정짓는 두번째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자료를 뒤지다 보니, 1999년 미국 서부 포틀랜드에서 시작하여 작년 10월 뉴욕 맨해튼에 브랜치를 냈다고 합니다. 현재 서부에서 4개, 동부에서 1개, 모두  5개 정도 운영되는 모양입니다. 부디 무리한 확장을 하지 말기를... 하여 그 좋은 맛을 계속 유지하기를... 토론토 같은 대도시에 하나 정도만 만들기를... 이런 생각이 들게 합니다. 스타벅스의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인 것입니다.

  스텀프타운 커피점에서 손님이 그려두었다는 재미나는 이미지를 하나 발견해 올립니다. 스타벅스는 초창기 충격을 준 이후, 너무 급속하게 확장을 하는 바람에 맛과 이미지가 많이 죽었습니다.  맨해튼에서 스터벅스를 찾는 이유는, '쉽게 사먹기' '인터넷 하기' '화장실 가기' 이 세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빈 자리 찾기는 참 어려웠습니다. 인터넷 하는 사람들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