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커피축제에서 본 풍경과 장인

  10월말 한국에 갔다가 쓴 기사입니다. <시사IN>에 게재된 것으로, 인터넷에 올라왔길래 블로그에도 올립니다. 사진은 사진은 윤무영 기자의 것이며, 게재 허락을 득했습니다.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영진리 181번지. 네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하고도 한 번에 찾기 어려운 바닷가 오지. 제2회 강릉커피축제(10월22~31일)의 둘째날인 10월23일(토) 오전 8시50분. 커피점 문을 열자마자 바깥에서 기다리던 손님들이 들어와 6개 테이블의 절반을 채웠다. 지난해 시작된 강릉커피축제의 시발점이 된 커피전문점 보헤미안이다.

  오전 10시를 넘어서자 여섯 테이블 남짓의 커피점은 만석이었다. 입구에 놓인 대기석에까지 손님이 앉아 있었다. 대부분 자동차를 몰아 왔고, 강릉에서 1만4천여 원을 지불해야 하는 택시도 수시로 들락거렸다. 주차장에서는 안내원이 차량을 정리하고 있었다. 서울 전주 대구에서 찾아왔고, 일본인 중국인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동쪽 벽은 유리창이다. 바깥으로 동해의 푸른 아침이 펼쳐져 있다. 넘실대는 파도를 바라보며 커피 한 잔을 마시는 풍경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었다. 박이추 보헤미안 대표는 “평소 아침에도 손님들이 오는데, 커피축제가 열려 더 많이 온 것 같다”고 말했다.

  오후 1시께 커피축제의 거점인 강릉항으로 들어가는 길은 승용차와 택시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주차장에서는 빈 자리 찾기가 쉽지 않았다. 행사장이 있는 강릉항 건물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섰다. 수많은 이들이 각종 커피 체험을 하기 위해 불편을 감수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강릉시청의 의뢰를 받아 이 행사를 주관한 이벤트 업체의 관계자는 “강릉에서 여러 축제의 실무를 맡아했지만 커피 축제는 우리도 놀랄 만큼 사람들이 빨리, 많이 모인다. 축제가 22일 오전 10시부터 시작되었는데, 30분 전부터 줄을 서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고 말했다. 커피 지도 4만부와 안내 책자 1만부를 찍었으나 이틀만에 바닥을 보여 서너 명에게 한 부씩 나눠주고 있었다.

  강릉항 마리나 건물 1~2층은 축제 기간에 커피 박물관과 체험관으로 바뀌었다. 8세기께 에티오피아 카파(지금의 짐마)에서 양치기 소년 칼디가 양들을 따라 처음 따먹은 커피 열매가 여러 세기 후 유럽으로 전파되어 세계화하는 과정에서 터키는 그 관문 역할을 했다. 바로 그 터키의 각종 커피 유물이 왼쪽 전시장을 가득 채웠다. 그 옆에는 왕산면 커피농장에서 온 크고 작은 커피 나무들이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오른쪽 전시장의 열기는 뜨거웠다. 중남미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 세계 각처의 산지에서 온 커피 생두를 현장에서 직접 볶았다. 강릉 커피아카데미를 운영하는 황광우씨는 가스 볶음기로 커피를 볶으며 연한 연두색 생두가 열을 받아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설명하는 데 여념이 없었고, 한 켠에서는 축제 스태프들이 수망을 흔들어 연기를 피우며 직접 콩을 볶았다. 검은 색으로 변한 콩은 잘게 갈려 한 잔의 커피로 바뀌었다. 커피를 내리는 방법도 여러 가지. 전용 주전자로 뜨거운 물을 커피 위에 살살 부어내리는 핸드 드립식, 작은 기구에 커피를 채우고 열을 가해 뽑는 모카포트식, 알콜불로 가열하여 추출하는 사이폰식 등 커피를 만들어내는 거의 모든 방식을 현장에서 직접 볼 수 있었다.

   30여 시간 유리 기구에 물을 한 방울씩 떨어뜨리는 더치식으로 커피를 뽑아 관람객들에게 한 잔씩 전해주던 한 자원봉사자는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바람에 더치 기구로 밤새 커피를 미리 내려 조금씩 맛만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로 두 번째를 맞이한 강릉커피축제에 이렇게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이는 까닭은 몇 년 전부터 일기 시작한 원두커피 붐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 고급 인스턴트 커피인 ‘맥심’이 국내 시장에 나온 이후 인스턴트는 금세 커피의 안방을 차지했다. 다방에서 마실 수 있었던 진짜배기는 ‘커피’라는 본연의 이름까지 인스턴트에 내주며 ‘원두커피’라는 생소한 이름을 달고 커피 문화의 변방으로 밀려났다.

  전체 커피 소비량의 10%에도 미치지 못하던 원두커피가 일반 소비자들의 관심사로 떠오른 것은 1990년말께부터였다. 미국의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 스타벅스가 서울 이대앞에 1호점을 내면서 에스프레소를 기반으로 하는 각종 커피가 젊은층의 관심을 끌었고, 그즈음 서울의 다도원 · 보헤미안 · 칼디커피 · 클럽에스프레소, 대구 커피명가 등에서 직접 볶는 커피가 애호가들 사이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스타벅스 · 할리스 · 커피빈 등 국내외 커피 프랜차이즈들이 에스프레소 커피 문화를 만들어가는 한편 생콩을 볶아 손님들에게 신선한 커피를 제공하는 ‘커피 볶는 집’ 또한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주)커피명가의 안명규 대표에 따르면, 커피 열기를 더욱 뜨겁게 달군 것은 3년 전에 방영된 드라마 <커피프린스1호점>. “우리 손님들을 대상으로 원두커피에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에 대해 설문했더니 50% 이상이 그 드라마를 꼽았다.”

  커피를 볶고 손으로 직접 내리는 드라마 속의 광경은 새로운 소비자를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바리스타’라는 직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바리스타 교육기관이 급속히 늘어났고, 자격증 제도까지 생겨났다. 2000년 단국대 사회교육원에서 시작된 커피전문가 과정은 수십개 대학 평생 교육원의 인기 프로그램으로 떠올랐다. 몇몇 전문대의 조리학과를 폐과 위기에서 구해낸 아이템도 원두커피였다. 지금은 백여 개의 커피교실이 유명 커피점과 대학의 평생 교육원에 설치되어 있으며, 창업반에도 많은 사람이 몰리고 있다. 그러는 사이, 원두커피는 전체 커피 소비량의 20%까지 점유하기에 이르렀다. 한 해 한국 시장에서 소비되는 커피는 2조원대 가량으로 추산된다.

   커피 열풍이 점차 거세지는 이즈음 왜 하필 강릉인가? 축제를 통해 지역 홍보와 수익 증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각 도시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터에, 강릉에 ‘호박이 넝쿨째 굴러 떨어지는’ 일이 일어났다. 전국 커피 마니아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보헤미안 대표 박이추씨가 서울에서 강릉으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커피 마니아들 사이에 커피 장인이라 불리던 박대표의 이동은 커피의 중심축을 강릉으로 옮기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다.

  2000년대 초반 강릉에서 태동한 커피전문점 테라로사(대표 김용덕)의 전국적 유명세도 강릉을 커피 도시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구정면 어단리 시골에 위치한 테라로사 본점은 강릉을 찾는 관광객의 방문 코스로 떠올랐고, 테라로사에 가기 위해 관광객이 강릉을 찾았다.

  여기에 더해 과거 안목항이라 불린 강릉항 주변 환경도 강릉을 커피의 새로운 메카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바닷가를 따라 길게 이어진 길은 일찍이 카페와 커피 자동판매기들이 줄지어 늘어선 커피 산책로로 명성을 떨쳤다. 지금은 커피커퍼 등 10여개 커피 전문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강릉커피축제를 주최한 강릉시 문화관광과의 공기종 과장은 “예로부터 강릉에는 남향진의 한송정에서 시작된 전통 차 문화가 널리 보급되어 있다. 시민들의 모임도 많고, 신사임당 · 허남설헌에게 바치는 다례 또한 유서 깊은 유산이다. 이같은 전통 차 문화가 커피와 자연스레 연결된 것으로 보면 된다”라고 말했다.

  작은 예산(1억원)을 들인 새내기 지역축제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큰 요인은 뭐니뭐니 해도 천혜의 자연 조건이다. 영동의 단풍이 가장 곱게 물드는 10월말이면 가을 바다 빛은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다. 남대천이 바다와 만나는 바로 그 지점, 창 밖으로 바다가 보이는 커피점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는 행위는, 커피의 장르나 맛을 떠나 그 자체로 하나의 ‘황홀한 문화 체험’인 것이다. 더불어 국제적인 지역 축전으로 각광 받는 강릉단오제를 치른 경험이, 인구 22만의 작은 도시가 커피축제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강릉시에는 커피전문점이 130개가 넘는 것으로 집계된다. 커피점에서 커피를 볶아 신선하게 제공하는 방식도 강릉에서는 낯설지가 않다. 미국의 유명 프랜차이즈 ‘별다방(스타벅스)’ ‘콩다방’(커피빈) 하나 들어와 있지 않지만, 커피의 생명인 신선도를 자랑하는 스페셜티 커피 전문점들이 강릉에 ‘커피 도시’라는 이미지를 하나 더 추가했다.

  축제를 주관한 업체의 한 관계자는 “작게 생각했는데 집계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분들이 오셔서 당황스럽다. 내년부터는 좀더 확실하게 준비해서 손님을 맞겠다”고 밝혔다.

강릉커피축제에는 지난해 38개 커피전문점이 참여했고, 올해에는 93개 업소가 함께 하여 시음회 · 할인 등의 각종 이벤트로 축제를 이끌었다. 

 박스 기사

커피 장인이 동해로 간 까닭은?

 

 2000년대 초반 한국스페셜티커피협회(SCAA) 안명규 회장(대구 커피명가 대표)은 스페셜티커피계의 선배들에게 ‘1서쓰리박(고 서정달, 고 박원준, 박상홍, 박이추)’이라는 애칭을 붙였다. 커피전문점 보헤미안 박이추 대표는 바로 그 ‘쓰리박’ 가운데 한 사람이다.

서울 안암동 고려대 후문쪽 지하에 자리를 잡고 강하게 볶는 커피로 이름을 날리던 박대표는 서울에서 다진 비즈니스 기반을 고스란히 남기고 낯선 곳을 찾았다. 동해였다. 2000년 오대산 진고개를 거쳐 강릉 경포대에 보헤미안을 열었으나, 관광지 특유의 시끌벅적함이 싫어 ‘조용하게 커피를 공부하고, 볶고, 손님들에게 내기 위해’ 교통이 불편한 연곡면 영진리로 터전을 옮겼다. 2004년 7월이었다.

동해와 어우러진 보헤미안의 ‘커피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불편을 마다 않고 찾아오는 팬들에게 박대표는 모든 커피를 직접 내려 보답한다. 볶은 지 며칠 되지 않은 신선한 커피를 제공하는 것은 서울에서와 다를 바 없으나, 강릉에서는 잔에 담기는 모든 커피를 그가 직접 추출한다. 커피를 내리는 그의 모습은, 보헤미안을 찾은 커피 애호가들에게 좀체 보기 드문 퍼포먼스이다. 같은 커피라도 단호한 표정으로 내리는 그의 커피는 어딘지 묵직하고 깊은 맛을 더 느끼게 한다.

3시간 남짓 인터뷰 하는 동안 그는 수시로 주방에 불려 들어갔다. “커피 준비되었습니다”라고 직원이 호출하면 그는 부리나케 몸을 옮겨 2분 여에 걸쳐 핸드드립 커피를 만들어냈다. 손목을 많이 쓰는 바람에 인대가 늘어나고 체력이 부쳐 얼마 전부터는 일주일에 이틀(월 화요일)간 문을 닫는다.

동쪽의 조용한 바닷가에서 커피를 공부하고 볶고 뽑겠다는 그는 오래된 꿈을 이루었다. 애호가들은 커피 장인을 찾아 그를 지지했고(나는 캐나다에서…), 강릉은 커피축제를 열어 장인의 열정에 화답했다. 박대표는 “보헤미안에 오시는 분들이 커피와 풍경을 함께 즐기며 잠시나마 행복해 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