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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이야기

평양냉면에 담긴 슬픈 분단 가족사

  어제 평소 가깝게 지내는 대학 대선배님과 저녁을 함께 하며, 평양 출신인 그 분의 비극적인 가족사에 대해 들었습니다.

   가족사를 듣기 위한 자리는 아니었으나 냉면 이야기를 시작으로 60년 전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왔습니다. 흘러나왔다기보다는, 역사와 사람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제가 계속 질문을 드렸던 것이지요.



  그 분의 가족은 1948년께 평양에서 서울로 내려왔습니다. 당시 그 분의 나이는 5~6세였을 겁니다. 

  그 분은 지금도 서울에 들어갈 때면, 하루 한 끼는 꼭 냉면으로 해결한다고 했습니다(냉면 하면 통상 평양 물냉면, 함흥 비빔냉면을 말하지만, 냉면을 아는 사람이나 평양 사람들은 함흥 냉면을 냉면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고저, 우리네끼린, 냉면 하면 평양 물냉면을 말합니다).

   토론토에서는 냉면다운 냉면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출국날에도 을지로4가를 꼭 들러 고국에서의 마지막 식사로 냉면을 드신다 했습니다. 그 분의 부인께서는 "시집을 왔더니 시댁 식구들이 냉면을 밥처럼 드셔서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부인은 서울 출신입니다.

  그 선배님은 지금 은퇴하여, 부부가 여행과 골프 등으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황혼을 즐기고 계십니다. 요즘 꿀꿀이 독감으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1주일 여행상품이 1천달러도 되지 않는다는 화제로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선배님, 그러면, 이번 기회에 평양에 한번 가보시지요. 가서 가족도 만나시고, 그 좋아하는 냉면도 실컷 드시고..."

  "내가 직접 아는 가족이야 지금 생존해 계신 분이 없을 거야. 삼촌과 누님들이 남으셨는데, 사촌·조카 찾아야 알아보기도 힘들테지."

  그 분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약대를 나왔다고 했습니다. 유학을 보낼 정도면 대단히 큰 부자였을 것입니다.

  광복이 되고 소련군이 평양에 들어왔습니다. 그 집의 장남(토론토 그 분의 장형)이 당시 고등학생이었는데, 반탁운동을 하다 투옥되었습니다. 당시 그 분의 아버지는 김일성대학에 교수로 채용되기 직전이었습니다.

  가족이 구명에 애를 썼다고 합니다. 감옥에서 나오기 직전 장남이 "갇힌사람들과 모두 함께 나가는 게 아니면 나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장남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시베리아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김일성대학 교수 임용을 눈앞에 두고, 장남이 유형을 가는 고초를 겪은 그 분의 아버지는 남하를 결심했습니다. 장남이 저렇게 된 판국에 북한에서 아버지는 물론 그 가족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장남의 위로는 시집을 간 누이가 둘 있었다고 합니다. 그 누이들도 공부를 비상하게 잘 하여, 1년에 한 명씩 들어가는 평양제1고녀 출신들이라고 했습니다.

  그 분의 아버지는 남한으로 내려와 서울대 약대에서 교수 제안을 받았는데, 거절했다고 합니다. 이유는 "빨갱이가 너무 많아서…." 월남하신 분들이 왜 좌익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 아주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 후 그 분의 가족은 남한에서 장남의 생사라도 알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중앙아시아를 통해 남한으로 온 어떤 사람으로부터 "시베리아로 함께 끌려갔다가, 어느 지점에서 헤어졌다. 헤어진 그 일행은 다 죽었다고 누가 전했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들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끌려간 큰 아들 때문에 평생 대못을 가슴에 박고 사셨지."

  그 분이 캐나다에 오신 지는 30년이 훨씬 넘습니다. 그 사이에 캐나다 시민권자로서 평양에 갈 수도 있었으나, 서울에 있는 형제와 조카들 생각하여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1980년대까지 시퍼렇게 살아 있던 무시무시한 연좌제를 간접 경험이라도 했던 사람이라면 지레 겁을 먹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부모님이 평양 집의 주소와 구조를 상세히 그려서 우리에게 남기셨지. 통일 되면 가서 찾으라고…."

  더 재미나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북한 당국에서 장난칠까 싶어 밝히지 않겠습니다. 

  이념과 전쟁, 강대국, 정치가 같은 게 도대체 무엇이길래, 가족을 이렇게 갈갈이 찢어놓는지, 돌이켜 생각하니 말도 안되는 일들이 우리나라에서는 지금도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개성공단, 로켓발사, 금강산 관광, 통일, 탈북 어쩌고 저쩌고 하는 거 다 좋지만, 이런 것  저런 것 떠들고 협상하고 실행하기에 앞서, 저런 슬픈 가족사부터 바로 잡아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1세기 대명천지에, 아직도 가족이 찢어져서 마음대로 보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여전히 미개한 민족이자 야만적인 민족입니다. 

  그 분은 당장 오늘이라도 평양에 냉면을 먹으러 가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지 않는 게 아니라 가지 못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연좌제의 망령에서 심리적으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언젠가는 그 분을 모시고, 언젠가는 평양 옥류관 냉면을 꼭 먹어보겠다고 작정을 하며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