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5월 5일 경무대(현 청와대) 앞 소요 사건을 아십니까?
건국 이래 학생이 주동이 되어 벌인 최초의 데모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의 이승만 후보를 제칠 것으로 예상되었던 해공 신익희 후보가 급서한 후, 자유당에 염증을 느낀 야당 지지자들은 운구를 모시고 효자동 해공의 집으로 행진을 합니다.
경무대 앞에 다다랐을 때, 운구를 따르던 지지자들이 흥분하여 '소요'를 일으켰습니다. 소요의 주동자들은 이승만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지만 거절 당합니다. 경찰은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총을 쏘며 시위대를 해산시킵니다. 이 과정에서 1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1960년 4월 혁명의 전조가 된 이 데모의 주동자는 당시 고려대 사학과 2학년에 재학중이던 정국로였습니다. 정국로는 현장에서 체포됩니다. 투옥→고문→감형→석방에 이르기까지 3년이 걸렸습니다.
옥에서 나온 이듬해 교내에서 4월을 맞이했고, 당연히 '선봉에 서서' 혁명을 이끌어 냅니다.
제가 노혁명가를 처음 뵌 것은 지난해 3월 어느 모임에서였습니다. 1932년생인 정국로 선생은 건강이 좋지 않은 듯 지팡이에 몸을 의지해 나왔습니다. 발언의 기회를 드리자, 경무대 앞 사건과 4월 혁명에 대해 간결하게 설명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변절'하지 않은 노혁명가를, 처음으로, 직접 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떨렸습니다. 제가 마치 20대로 돌아간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세기·이수정 등 1960년 4월 혁명의 학생 지도자들이, 군사독재 정권에 붙어 대부분 변절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선생의 대학 동기라는 어떤 분은 말했습니다
"국로와 나, 그리고 강만길, 이렇게 셋이서 사학과 3총사로 불렸네. 진짜 혁명가는 그 인생이 끝까지 험난한 모양이야."
1980년대 말 아르헨티나를 거쳐 캐나다로 건너온 정 선생은, 그 이전에나 이후에도 평탄한 삶을 살지는 못하신 듯합니다.
지난 5월11일(월) 세상을 떠난 정국로 선생의 입관 예배에 다녀왔습니다. 토론토에서 서쪽으로 1시간 가량 달려야 나오는 옥빌이라는 도시의 동신교회에서 5월14일(목) 오후 7시30분에 열렸습니다.
한번밖에 뵙지 못했고, 개인적으로는 말씀 한번 나눠보지 못했으나, 외국땅에서 세상을 뜬 노혁명가가 가시는 마지막 길을 배웅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캐나다에서 행해지는 개신교식 장례식에 처음 참석했습니다. 노혁명가의 이름을, 그가 젊음을 불사르며 사랑했던 조국에서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기억은 못하더라도, 블로그에서나마 기록은 해두고 싶어 사진과 더불어 올립니다. 캐나다식의 장례식을 소개할 겸하여….
입관 예배가 열린 캐나다 동신교회의 바깥 모습입니다. 교회인데도 박스형의 건물로 지어져 대단히 소박해 보였습니다. 널찍한 주차장에서 주차요원들이 문상객의 차를 안내했습니다.
입구에는 고인의 생전을 소개하는 각종 자료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신문과 사진 등 각종 자료 중에서도 고인의 사진과 포상증이 눈에 가장 먼저 띄었습니다. 2006년 4·19 유공자로 인정되어 뒤늦게 훈장을 받았습니다. 외국에 사는 관계로, 포상자 명단에서 누락되어 맨 마지막에 받았다고 합니다.
1995년에 펴낸 <한국학생운동사>에 실려 있는 정국로 선생의 약력입니다.
1957년 경무대 앞 소요사건의 공판 장면(위). 맨 왼쪽이 정국로. 그 아래는 7개월 만에 석방된 주역들의 모습입니다.
1956년 5월6일자 <동아일보> 기사. '경무대 앞서 유혈충돌'이라고 객관적으로 적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도 <조선일보>는...
'폭동은 민주당 지령이라고' 경찰의 발표를 그래도 적었습니다. 왼쪽 연두색을 칠한 부분은 '그 가운데서 이번 폭동의 주모자인 고려대학교 문리과대학 2학년 정국로(鄭國老 · 25 · 관훈동 192의 38) 군을 구속조치하는 동시에…'라는 경찰 발표문입니다. <조선일보>는 이렇게 전통이 있는 신문이었습니다.
입관 예배(천국 환송 예배)가 막 시작되는 모습입니다. 처음에는 빈 자리가 더러 보였으나, 평일인 관계로 늦게 오는 문상객이 많았습니다.
정 선생의 영면한 모습입니다.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내부도 소박했습니다. 교회다워 보였습니다.
장례업자가 차후 일정을 설명하는 모습입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입니다. 영어와 한국어로 설명하면서, 뒷줄부터 나와 고인을 보고 가족을 위로해 달라고 했습니다. 또한 옆방에 마련된 다과를 꼭 드시고 가라고 당부했습니다.
'천국 환송 문상'. 예배가 끝난 후 문상객들이 고인과 작별하는 모습입니다. 앞쪽 오른쪽에 서 있는 이들이 유족들입니다.
노혁명가는 외국땅에 나와서도 풍족하게 살지는 못한 듯합니다. 예배를 이끈 목사의 설명에 따르면, 고생을 참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인, 친지, 지인 등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고인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예배 내내 고인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애써왔는가 하는 것이 강조되었습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요하지 않았으나 마음만은 어느 누구보다 부자로 살다 가셨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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