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토=성우제) 블로그를 함께 하는 김상현씨가 메일을 하나 보내왔습니다. 서명숙 선배 블로그에 댓글을 남겼더니 답장이 왔다고 했습니다. 반가운 김에 전화를 했더니, 예의 그 큰 목소리로 "야, 우제야"라며 단박에 목소리를 알아맞췄습니다.
2002년 뜻한 바가 있어 그녀가 토론토로 2주간 '정신적 망명(정치적 망명이 아닙니다)'을 단행한 이후 잠시나마 처음 나눠본 대화입니다. 1989년 5월 한 직장에서 처음 만나 꼬박 13년 동안 지지고 볶으며 한솥밥을 먹은 사이여서 지금도 나에게 "우제야"라고 서슴없이 이름을 부릅니다.
서명숙 여사의 애초 별명은 '맹숙 언니'입니다. 맹하다고 맹숙이 아닙니다. 이름을 코믹하게 만들어 그렇고, 맹렬하다고 맹숙이었습니다. 본격적인 정치부 여기자 1호를 기록하더니 그 맹렬함이, 이제는 다들 아시는 제주올레로 옮겨갔습니다.
제주올레를 시작한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부터 "발을 떼는 순간 정점에 올랐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묻혀 있던 조물주의 '작품'을 발굴해 세상에 소개했기 때문입니다. 조물주의 작품은 그것 자체로 완벽하기 때문입니다. 이밖에도 제주올레가 단박에 세계 최고의 문화 이벤트 경지에 단숨에 오른 이유를 꼽자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속도전에 지친 현대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숨구멍을 제공한다' 따위의 수사는, 신문잡지 기사에서나 소용되는 '헛소리'에 가까운 것이고,,, 자전거 타며 놀던 작가 김훈이 직업란에 '자전거 레이서'라고 쓰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일단, 운동에서부터. 평범한 사람들의 운동 가운데 걷기 운동만큼 좋은 것은 없다고 합니다. 조금 빠르게 걷기야말로 관절에 무리를 주지 않으면서도 유산소 운동을 가능케 하는 가장 효과적인 운동입니다. 걷자고 온 길에서 혼자 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올레길에만 들어서면 가장 좋은 운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저는 이 운동을 대학시절부터 수안보에서 문경새재를 넘으며 여러 차례 경험했습니다.
둘째. 혹자는 걷기에 대해 과도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산책은 사색이다, 자기를 돌아보게 한다 하면서... 이 또한 신문잡지의 기자들이 문화면에서나 쓸 수 있는 공허한 소리에 가깝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공허한지 저런 헛소리들을 많이 써봐서 잘 압니다.
걷을 길을 일부러 찾아 걸을 때, 머리에 남는 것은 '아무 생각 없음'입니다. 일상에서 슬쩍 빠져나와, 아무런 생각도, 목적도 없이 그냥 정처없이 걷는 겁니다. 걷는 길에서는 걷지 않으면 안되고, 걷다보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걷다 힘들면 '내가 왜 이 짓을 하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복잡한 곳에서 몸을 빼는 것만으로도 무념의 상태 혹은 한 가지 단순한 생각에 도달하는 셈입니다.
마지막으로. 제주 섬은 그 풍광이 아름답기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곳입니다. 올레길에 서면 하늘과 바다와 산을 동시에 볼 수 있습니다. 외국에 살다가, 몇년 만에 제주 섬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서귀포의 하늘과 바다를 보면서 눈이 부셔서, 거의 눈을 뜰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한라산이라는 명산이 고개만 들면 눈 한 가득 들어옵니다. 바로 이곳에 길을 내어 '함께 걷자'고 제안하고 있으니, 사람들은 그 풍경 감상만으로도 거의 까무라칠 것입니다. 대학 시절 여행 때나 신혼여행 중에 버스 혹은 택시 안에서 보던 제주의 풍광을, 자기 발로 직접 땅을 밟아가며 느긋하게 감상하는 황홀함은 지상 최고의 미술관에서 최고의 미술품을 감상하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이름도 기가 막히게 잘 지었습니다. 제주 섬 토속어를 동원하여 '올래?'라는 의미까지 더했으니 말입니다.
어제,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은 전화로 자랑을 했습니다. "야, 성우제, 너 그거 알아? 택시를 타도 요금을 안받으려 해. 호호 " 지난해 상반기에만 8만명이 다녀갔다니, 그곳을 찾아간 이들이 택시뿐 아니라 지역 경제를 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주도의 관광은 박제화된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호텔에 묵으며, 골프장이나 정해진 관광 명소를 찾아다니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그 명소 곳곳을 선점해 주야장창 장사를 하는 곳은 다름아닌 뭍에서 온 대자본입니다. 제주 사람들은, 제주 관광에서도 들러리로 밀려난 처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주올레를 찾는 사람들은 다르답니다. 작은 동네에서 민박하고, 작은 식당에서 밥먹고, 작은 시장에서 토산품을 삽니다. 더군다나 제주 섬에서도 포화 상태에 이른 자가용과 렌터카 과잉 때문에 택시 기사들은 거의 밥줄이 끊길 지경인 터에, 올레 사람들이 걷기를 끝내고 하는 수 없이 숙소까지 택시를 이용해야 하니, 또한 택시를 이용할 정도의 여유는 있는 사람들이니 기사들이 환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관광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문화와 관광으로 불러일으키는 부가가치가 이렇게 '눈에 보이게' 나타나니, 이것이야말로 문화산업의 모범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수십년 전부터 선진국들은 자기네가 지닌 문화예술 자산을 가지고 문화전쟁을 벌여오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루브르, 영국의 대영박물관 등이 미술 이미지를 가지고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지, 또 날마다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여 돈벌이에 얼마나 혈안인지 모릅니다. 게다가 축제는 어떻습니까? 프랑스의 인구 7만 도시 칸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은 바로 영화제 때문인데, 칸이 세계 영화 발전을 위해 영화제를 하느냐? 그게 첫번째 목표인가? 천만의, 만만의 콩떡입니다. 영화제를 띄워 도시를 홍보하고(영화제 때는 영화시장 열어 돈벌고), 1년 내내 그 유명세를 이용해 돈을 벌어들입니다. 관광 수입은 새발의 피고, 영화제가 열리지 않는 기간에 각종 국제회의, 페스티벌을 유치하여 떼돈을 벌고, 그것으로 먹고 삽니다.
도시마다 앞을 다투어 여는 지역축제의 가장 큰 목적은 지역 주민의 화합과 지역 경제 활성화입니다. 볼거리를 만들어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면 화합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영화제다, 비엔날레다, 문화유산이다, 미술관, 연극축제다 하여 전세계 도시들이 떠들썩한 가운데서도, 내가 보기에, 제주올레를 따라올 만한 문화 이벤트는 없습니다. 주야장창 제 아무리 뛰어난 고대 이집트, 그리스, 로마 문물이라고는 하나 사람이 만든 것을 조물주의 작품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사시사철 언제나 열여 있고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니,,,
제주올레는 서맹렬 여사가 발견한 조물주의 작품입니다. 그 작품을 발굴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소개한 것입니다. 발굴을 했다고 하나,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 것입니다. 거기에 있었으나 거기에 있는 줄 아무도 몰랐습니다. 기자시절에도 서맹렬 여사의 강점 가운데 하나는 '번쩍 하는 황홀한 순간'이 자주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황홀한 순간'을 낚아채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을 뿐입니다(번쩍 하는 순간이 황홀하지만은 않았던 것이, 기사가 조금만 늦어도 뚜껑이 번쩍하는 순간에 열렸기 때문입니다. 기사 아무리 잘 써도 마감 조금만 넘으면 후배들을 엄청나게 쥐어박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가...아이고...).
이벤트 한다고 큰 돈 들여 건물 짓고 도로 내고, 홍보 한 것도 아닙니다. 멀쩡하게 나 있는 길과 길을, 포크레인 몇 삽으로 이어붙였고 길을 가로막는 골프장이 보이면 골프장 자체를 길로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골프도 어찌보면 걷자고 하는 운동이니(이런 거 생각하면 카터 타고 골프치는 사람들 좀 이해가 안됩니다), 같은 운동을 하는 이들이 골프장을 잠시 가로질러가겠다고 하는데 같은 종목 선수끼리 시비는 걸지 않을 것입니다. 홍보 또한 떼돈 들여 한 게 아니라 그저 입소문으로 알음알음 알려져서, 작년에는 토론토의 어느 분이 제주올레에 다녀왔다고 제게 자랑을 할 정도입니다. 입소문 홍보만큼 무서운 게 없습니다. 토론토에까지 왔기 때문입니다. 어제 맹렬 여사가 뭐라고 뭐라고 이야기했으나, 토론토에 앉아서도 이미 다 아는 내용이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걷는 길을 가보니, 군데군데 차도와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반면 제주올레는 동네길, 밭길, 바닷가길 들로만 이어져 있답니다.
서맹숙 여사는 코스를 하나 열 때마다 세계적인 특종을 한 기분이라고 했습니다. 기자에게 대형 특종이란 몇날 며칠을 사그라들지 않는 오르가즘 속에서 사는 것과 똑같은 경지입니다. 게다가 '흙에 살리라' 하며 귀향해 고향을 세계 만방에 알리고 있으니, 기자 출신 가운데 이렇게 잘 풀린 경우도 드뭅니다.
캐나다에서 봐도 제주올레길은 이렇게 대단합니다.
뒷말 : 제가 G20 이벤트 기획자라면 20개국 정상들을 제주올레로 보내, 각기 마음 가는대로 짝지어 이야기하도록 길 위에 풀어놓겠습니다. 1~2시간만 걷게 하면 오죽 많은 이야기가 오가겠습니까만서도... 제주의 아름다움도 전세계에 자연스레 소개하고... 마침 정상회담 기간이 제주올레 축전과 겹치는군요. 서울에서 백날 해봤자, 더이상 알릴 것도 없을 터이니...
*사진을 올리려 아무리 용을 써도 안됩니다. 아쉽게도...
'문화 예술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복되는 일상은 그 자체로 예술 (6) | 2010.03.30 |
---|---|
기자 초년병과 지망생에게 필독서 2권 (2) | 2010.03.28 |
아이패드를 계기로 본 '웹 2.0' 시대의 책 읽기 (4) | 2010.01.31 |
'호밀밭의 파수꾼'과 'The Catcher in the Rye' 사이의 아득한 거리 - J.D. 샐린저를 추모하며 (7) | 2010.01.30 |
우리는 왜 종종 비이성적이고 멍청한 선택을 하며 부화뇌동 하는가? (10) | 2010.0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