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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문학

반복되는 일상은 그 자체로 예술

 뉴욕이든 토론토든 북미지역 어느 도시에서도 남녀를 불문하고 운전을 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배려는 많아도운전 못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는 거의 없다. 그 불편함은 고스란히 비운전자의 몫이다.

뉴욕 브루클린에살며 작업하는 작가 이가경은 운전면허증이 없다. 집에서 작업실까지 걸어 다니고, 두 아이도 걸어서 등하교시킨다.집과 자녀들 학교와 작업실이 모두 걸어서 10분 이내의 거리에 있다. 그는 그 불편한 걷기를 뉴욕에서 즐긴다. 세계 최첨단 도시에서 작업하면서,보기 드물게 아날로그형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출처: 이가경의 홈페이지 초기 화면 http://www.kakyounglee.com/


 걷기를 좋아하는 바로 그 아날로그형 삶의 성격과 형식은 그의 작업으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최첨단 도시에서의 걷기처럼, 첨단 디지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애니메이션 속에서의작업은 철저하게 수공업적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애니메이션의 기초 작업은 200자 원고지에 연필로 글씨를 꾹꾹 눌러쓰는 것만큼이나 아날로그적이다.

 이가경의 작품은 움직임과 소리를 기본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이다. 미디엄은 디지털 애니메이션이지만애니메이션을 구성하는 기본 내용물은 드로잉과 에칭이다. 목탄이나 연필로 제작한 흑백 드로잉, 플랙시 글래스 위에 새겨 찍은 판화가 소리와 함께 애니메이션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이다. 34초짜리 짤막한 애니메이션이라 하더라도 에칭 156점이 사용된다. 오랜 시간과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홍익대 판화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한 작가가 판화와 애니메이션의 결합을 시도한 것은 2001년 뉴욕주립대퍼체이스 칼리지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한국에서부터 판화를 가지고 슬라이드 쇼를 하곤 했던 그에게 한 교수가 “판화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보라”고권했다.

판화로 만드는 애니메이션? 언뜻 생각하기에 그 접점을 찾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동작을 표현하기 위해 속도전을 펼치며 한 장 한 장을 만드는 애니메이션의 밑그림 작업을 판화로 한다?

 두 장르를 결합하게 된 동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2001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윌리엄캔드리지가 뉴욕 소호의 뉴뮤지엄에서 개인전을 열었는데, 바로 그 전시에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캔드리지는 목탄을 밑그림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으로 인종차별 등 사회적 이슈를 영상에 담아내는 ‘필름 메이커’였다.

이가경(아래 사진)은 소리가 있는 슬라이드 쇼에서, 소리와 동작이 있는 애니메이션으로 나아갔다. 그는 목탄 · 연필 드로잉으로, 혹은 에칭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냈다. 소리는 자연과 일상생활의 그것을 그대로 따왔다.


컴퓨터로 웬만한 것은 모두 만들어내는 세상에서 이가경의 방법론은, 걷기와 같은 ‘거부할 수 없는 삶의 기본 방식’과 닮아 있다. 작업 방법론 자체가 작업의 의미를 내포한다. 끝없이 순환하고 반복되는 일상생활의 단면을 비디오 카메라로 찍은 다음, 장면 하나 하나를 사진으로 만든다. 그 사진 이미지를 종이 위에 드로잉하거나, 아크릴에 새긴다.

드로잉은 사진을 찍고 지운다. 그 위에 또 그림을 그려 사진을 찍고 지워나간다. 에칭의 경우, 프레스로 한 장을 찍어낸 다음 사포로 지우고 다시 새겨 다른 한 장을 찍어내는 방식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생활처럼 묵묵히 수행하지 않으면 안되는 작업 방식이다.

이렇게 그리고 찍어낸 수십, 수백장의 판화가 컴퓨터 안에서 이어져 애니메이션 작품으로 탄생한다. 동작 하나 하나를 그려 이어붙인다는 점에서는 일반 애니메이션과 다를 바 없으나,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장면 하나 하나가 드로잉 · 판화와 같은 ‘작품’이라는 점이 일반 애니메이션과 다른 점이다(컬렉터들은 이가경의 작품을 애니메이션과 원화(판화)를 함께구매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11월 뉴욕에서 열린 ‘아티스트북 페어’에 이씨는 마이클스타인버그 갤러리 소속으로 출품했는데, 미국 의회도서관과 피카소의 아들 클라우드 피카소가 이씨의 작품을 구매했다. 클라우드 피카소는 애니메이션의 원화를 함께 사갔다).  

이가경의 작품의 주요 소재는 일상생활이다. 일상생활 가운데서도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것은 가족인데, <Family Portrait>(2009)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45초 동안 진행되는 이 작품에서 카메라를 든 아빠는 “여길 봐요” “웃어요” “좋아요”하면서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포즈를 요구한다. “앞을 봐요” 하는 엄마의 목소리도 간간이 들린다.

이 소리에 맞춰 동작과 표정이 순간순간 변한다.157장의 에칭이 연속으로 결합하여 만들어내는 그 동작과 표정은 그 어떤 실제 영상보다 사실적이고 풍부해 보인다. 두 딸을 향한 아빠의 애틋한사랑은 목소리에서도 감지되지만 그 목소리에 반응하는 아이들의 표정과 동작에서 더 쉽게 읽힌다. 실제 영상보다 더 감동적인 가족 간의 무한한 사랑이1분 분량도 채 되지 않는 판화 동영상에서 집약되어 드러난다.

<Family Portrait>가 가족간의 사랑을 소리와영상으로 잔잔하게 풀어낸다면, <Day Series>(2007)는 말 그대로 끝없이 반복되는 일상생활의 풍경이다. 아이의 손을 잡고 걷고, 샤워를 하고, 설거지를 하는 광경 등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 해도, 지금도 앞으로도 결코 변하지 않을 일상의 모습들이다.

작가는 “애니메이션 작업을 시작하면서 내 주변에서 하루하루 반복되는 것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고 말했다. 일상에 주목하면서 일상이 쌓여서 이루어내는 역사와 일상의 잔영들을 작품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작가가 ‘고스트 이미지’라 부르는 그 잔영은 애니메이션 속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흔적으로 드러난다.

흑백의 단순한 톤과 발자국 · 샤워기 · 설거지 소리 등이 어울려 이루어내는 이가경의 애니메이션은 언뜻 보기에 그 내용이 단순하고 심심하다.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거리 풍경이라든가, 엄마가 부엌에서설거지 하는 광경, 엄마가 딸의 손을 잡고 걷는 장면 등은 익숙하다 못해 심심하기까지 하다.

이가경이 주장하는 바가 바로 그 ‘일상의 심심함’이 아닐까싶을 정도로 작품은 간결하고 단순하다. 흑백으로 이루어진 색 자체가 단순하고, 그 안에 든 내용 또한 단순하기 그지 없다.

단순함의 역설. 매일 반복되는 인간의 삶 자체는 단조롭고 단순하다. 그 삶이 아무리 단순해 보인다 해도 그 단순한 삶 속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는가. 흑백이 역설적으로 많은 색을 내포하듯이, 단순 간결하게 풀어나가는 이가경의 작품에는, 언어로는 풀어낼 수 없는, 단지 느낌으로만 포착할 수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마치 시(詩)를 읽을 때의 느낌 같은…. 물소리를 내며 설거지 하는 어깨를 들썩이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는 이들은, 모두가 자기의 이야기를 읽고 끄집어 낸다.

종이 위에 목탄으로 그려 제작한 애니메이션 <Walk>(2009)은 엄마가 나지막이 부르는 동요 <섬집아기>를 배경음악으로 하여 길을 걸어가는 내용이다. 마치 인생이라는 먼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모습처럼보인다.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의 뒤편에는, 그 사람이 걸어온 역사가 그림자처럼 계속 따라붙는다.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의 특성을 제대로 살려내는장면이다.

끊임없이 위를 향해 올라가는 사람을 형상화한 <Climbing Up>(2009)의 주인공처럼 이가경작 애니메이션은 일상생활의 끊임없는 반복이 내용의 중심을 이룬다. 작품의 제작 방식 또한 반복, 반복의 연속이다. <Walk>(2009)처럼3분에 이르는 ‘긴 작품’은 1,200장의 드로잉을 필요로 한다.

 작가는 반복이지루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사는 거니까. 이가경의 애니메이션 내용과 제작 방식은 바로 그 사는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작년 한 해 30만명의 사람들이, 단지 지루하게 걷기 위해 제주올레를 찾았다는 소식이 이역만리 북미지역에까지 들린다. 지루하지만 지루하지 않은 것. 단순하고 지루함 속에담긴 수많은 이야기. 이가경은 바로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가경 1975년 경북 왜관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판화과 학부와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2003년 뉴욕주립대 퍼체이스칼리지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2001년 서울 한전갤러리에서의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한국에서 3회, 뉴욕에서 1회 개인전을 가졌으며 다수의 기획전과그룹전 및 레지던시에 참여했다. 현재 뉴욕 마이클스타인버그 갤러리에 소속되어 작업 중이다.


<월간미술> 2010년 3월호에 게재된 글. 좋은 사진이 있으나 '시스템 문제로 사진을 올릴 수 없다'는 문구가 나와 아쉽게도 보여드리지 못합니다. 사진 올리는 방법을 찾지 못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