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활동중인 화가 문지하씨가 서울 소격동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다고 합니다. 서울에 계신 분들은 꼭 구경 가보세요. 놓치면 후회할 만한 좋은 작가의 좋은 작품입니다. 이곳에 들어가시면 자세한 안내가 나와 있습니다.
http://www.ararioseoul.com/
아래의 그림은 이번 개인전의 포스터입니다. 작품이 좋으니 포스터도 재미있게 나왔군요.
그 아래의 글은 지난해 <월간미술>에 게재했던 문지하 관련 글입니다. 뉴욕에서 전시할 때 인터뷰해서 썼던 글입니다.
작가 문지하씨를 만난 것은 개인전 오프닝 이틀 후였다. 11월13일 토요일 오전 10시. 뉴욕 첼시는 조금 이른 시간이어서 거리 분위기가 썰렁했다. 맨해튼 26가 527 W.의 메리라이언 갤러리에 들어서자, 바깥과는 달리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갤러리 큐레이터가 스무명 가까이 되는 관람객들을 앞에 두고 열심히 작품을 설명하고 있었다. 큐레이터는 조던 카니였으며, 애호가들은 뉴욕대학의 미술 프로그램에서 강의를 듣는 이들이었다. 그들이 보고 듣는 작품은 문지하씨의 개인전 <American Appendage>(11월11일~12월22일)에 나온 최근작 11점이었다.
작품들은 가로×세로 30인치 안팎으로 비록 크지는 않았으나 강열한 분위기로 보는 이를 단박에 끌어당긴다. 한국의 전통 오방색을 연상케 하는 현란한 색채가 폭풍우가 몰아치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는가 하면, 빨강 파랑 노랑의 색채들 사이로 붉은 꽃이 핀다. 물결이 이는 사이 사이로 느닷없이 사람의 팔과 다리가 등장하기도 한다. 음산한 기운을 느낄 수도 있고 밝고 경쾌한 분위기도 보인다. 문지하의 작품들은 마치 빠른 음악을 듣는 듯, 보는 이들의 시선을 휙 하고 몰아가는 속도감이 있다.
그림에서 속도감이라니? 때로는 물결 모양으로, 때로는 바람과 구름 모양으로 움직이는 여러 형상 때문일 것이다. 문지하의 평면 속 형상들은 움직이고 소리 지르며 아우성이다. 강한 개성을 지닌 형상과 색채 들이 서로 접촉하고 교섭하고 충돌하고 변화하면서, 화면 바깥으로 소리를 지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것만이 아니다. 형상들이 서로 만나 새로운 이미지를 그려내면서 그 이미지들이 모여 뜻밖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글자들을 보자. ‘ㅂ’과 ‘ㅇ’ 자음으로만 이루어진 글씨, 한글 자판으로는 쓰기 불가능한 한글 아닌 한글이 튀어나오고, 한글과 한문이 한 화면에 동시에 나오는가 하면, 영어와 한글과 한자가 뒤섞인 새로운 문자가 등장한다. 글씨체도 서예체를 비롯해 각양각색이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 뒤섞여 있는 듯하지만 그 안에는 새로운 질서가 있다. 문명 혹은 문화의 충돌과, 충돌 후에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새로운 질서이다. 문화의 충돌이 이루어지는 사회도, 그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도 새로 만들어진 질서와 분위기에 금세 익숙해진다. 미국 혹은 캐나다 같은 (유럽 사람들이 보기에) ‘신세계’에서는 유럽의 문명과 문화가 원주민의 그것과 뒤섞였으며, 그 혼혈 문화는 다시 흑인들의 아프리카 문화와 만났으며, 그 문화에 뒤늦게 합류한 나 같은 사람의 동양 문화와 또 만났다. 미국 문화의 특질을 ‘용광로’로 꼽지만 용광로 안에서 섞인다 하여 문화의 고유한 색깔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캐나다 문화가 모자이크 같다고 하지만, 각 민족의 색깔이 모자이크처럼 구획되었다 하여 담을 쌓고 서로 모른 체 하는 것은 아니다.
문지하의 작품이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힘의 우위를 따질 길 없는 문화와 문화가 교섭하고 충돌하며 섞일 때, 그 현장은, 그곳이 사회가 되었든 개인의 내면이 되었든, 충돌로 인한 에너지가 충만할 수밖에 없다. 작가는 말한다. “내 작품은 격한 감정을 끌어내는 것이 많다.” 격한 감정이란 아프고도 슬픈 감정이다.
그 충돌은 갈등이 되었건 조화로운 만남이 되었건 사회와 개인이 살아가게끔 새로운 형식의 문화를 만들어낸다.
<American Halfie>라는 작품을 보자. 문화와 문화가 접촉하면서 어떻게 제3의 문화를 창출하게 되는가를 파악할 수 있다. 쉽게 파악되는 형상만 보아도 무엇이 어떻게 결합했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여자의 얼굴이 등장한다. 눈은 작고 가로로 찢어진 전형적인 동양인의 것이다. 코는 오똑하고 머리는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에 나오는 전형적인 서양 여자 헤어스타일이다. 미키마우스의 둥근 귀 아래의 얼굴은 일본 캐릭터 헬로키티이다. 헬로키티의 ‘고양이’가 미키마우스의 ‘쥐’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결합해 있는 것이다. 쥐와 고양이조차도 정체성을 잃고 서로 섞여 새로운 정체성을 만드는 것이 작가가 파악한 미국의 문화 현실이다.
글씨가 적힌 종이들은 제사 때 쓰는 지방(紙榜)처럼 보인다. 그 안에는 영어가 적혀 있는데, 식사를 끝내면 중국 음식점에서 계산서와 함께 주는 ‘행운 쿠키’ 속의 ‘오늘의 운세’이다. 행운 쿠키와 오늘의 운세가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라 생각할 법하지만, 그것은 미국산이다. 동양 이미지를 가진 미국 문화인 것이다. 한국의 자장면이 중국에 없는 중국 음식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작품의 제목인 ‘Halfie’의 뜻은 ‘혼혈아’ 정도로 해석되는 속어이다.
“백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난 우리 아들을 한국에 데리고 가면 서양인으로 보고, 미국에서는 동양인으로 여긴다. 내가 작품에서 말하려는 것은 바로 그같은 미묘하고도 혼란스러운 문화적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이다”라고 작가는 말했다.
문지하의 추상은 그이가 사는 미국의 문화적 현실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단일 민족과 문화가 지배적인 한국 같은 곳에서야 개인의 정체성 문제가 심각하지 않지만, 다양한 문화 배경을 가진 여러 인종과 민족이 모여 사는 미국에서는 정체성 문제가 심각한 이슈로 등장한다. 역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미국 문화 자체는 온갖 것이 섞이고 섞인 ‘짬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뒤섞인 잡종 혹은 ‘짬뽕 문화’ 속에서 나의 정체를 찾는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문지하는 바로 그 문제를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드러낸다.
이번 전시의 제목으로 사용된 <Mac(American Appendage)>은 내용과 형식 모두 잡종 문화의 현실과 특질을 드러낸다. 문지하의 작품이 주는 큰 재미 가운데 하나는 작품 곳곳에 깔아놓은 해학과 은유적 장치들이다. Appendage라는 용어는 ‘부속물’쯤으로 해석될 터인데, 작가는 뜻밖에도 “나 같은 사람들을 은유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말한다. 미국 사람이기는 하지만 완전한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이 많다. 이를테면 Korean-American, Japanese-American. 심지어 흑인들은 African-American이다. 미국인은 미국인이되 늘 따라붙는 '000-American'의 바로 그 접두사와 같은 수식어 000을 부속물이라는 은유로 짚어낸다.
Mac은 무엇인가. 문지하의 작품에는 ‘Mac’은 ‘맥’이자 ‘脈’이다. 맥도날드의 Mac이며, 우리 말에서는 ‘맥을 잇는다’는 의미이다. Mac은 미국 전통의 맥을 잇는 맥도날드의 상징이다. 미국과 한국의 같은 발음, 다른 의미를 문지하는 이렇게 해학적으로 풀어낸다. 코리언 아메리칸이니 가능한 얘기다.
문지하의 화면에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해학과 유머가 도처에서 번뜩인다. 미키마우스(쥐)의 머리에 헬로키티(고양이) 얼굴이라는 숙명적인 ‘잘못된 만남’도 있고, 발음으로 이루어지는 말장난은 무거운 주제를 가볍고 경쾌하게 풀어낸다. <Yellno>라는 작품이 있다. ‘옐로’로 발음하면 ‘노랑’이라는 의미이다. 한국에서 노란색은 한때 저항의 상징이었다. 저항은 곧 ‘No’라고 외치는(Yell) ‘Yellno’이다. 문지하의 작품에서 노랑은 또 ‘怒浪’이다. 분노의 물결인 것이다. <Yellno>에서는 분노하고 저항하고, NO라고 외치는 강하고 무거운 의미가 들어 있지만 그 표현 방식은 이렇듯 단어 놀이를 하는 재미를 안겨준다.
문지하는 해학과 유머를 작품 곳곳에 배치하면서, 때로는 해학을 넘어 풍자에까지 이른다. 월남전에서 미군들은 비하하는 뜻으로 동양인을 “국”이라 불렀다고 한다. 문지하는 그것을 그들에게 그대로 돌려준다. <Beautiful Country>에서 미국은 말 그대로 ‘아름다운 국’이다.
문지하의 작품이 완전한 미국인도, 이방인도 아닌 코리언 아메리칸으로서 포착한 미국의 ‘짬뽕’ 문화 현실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면, 내용을 담는 그릇 또한 ‘짬뽕 스타일’이다. 문지하는 한국의 전통 한지에 잉크와 아크릴릭으로 작업한다. 그림을 그린 종이는 다시 캔버스에 붙여 고정시킨다. 혼합도 이런 혼합이 없다. 어쩌면 재료 자체가 혼합을 가장 큰 특징으로 하는 미국식 짬뽕 문화를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1999년 미국으로 건너와 아이오와 대학 대학원에서 공부한 문지하는 졸업 직전까지 캔버스에 오일로 추상 작업을 했다. 그이가 종이 위에 아크릴릭으로 옮겨간 것은 순전히 작업 환경 때문이었다. “남편이 워싱턴 DC에서 직장을 잡게 되어 이사를 갔다. 아이오와의 넓은 작업실과는 달리 워싱턴에서는 창도 없는 다락방에서 작업할 수밖에 없었다. 캔버스에 오일로 작업하는 것은 불가능한 환경이었다. 그래서 찾은 것이 종이 작업이었다. 무엇보다 빨리 말라 좋았다.”
작가에 따르면, 캔버스 대신 종이를 선택한 것은 열악한 환경의 산물이었지만 자기 개념을 드러내는 것으로는 적격이었다. 종이, 특히 한국에 나와서 발견한 한지는 물감을 잘 빨아들여 여러 요소가 층층이 쌓이는 것을 표현하는 데 더없이 좋았다. 문지하의 작업 개념이, 이질적인 문화가 접촉하여 부딪히며 만들어낸 정체성을 알 수 없는 새로운 잡종 문화를 읽어내는 것이라면, 한지 위에서의 아크릴릭과 잉크 작업은 그 의미를 잘 드러내는 적절한 재료일 뿐만 아니라 재료 자체로서도 작가의 개념을 잘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워싱턴DC에서 애틀랜타로 다시 옮겨간 후, 크고 작은 전시회에 꾸준히 참가해온 문지하는 2006년 뉴욕 아시아 소사이어티 앤 뮤지엄에서 기획한 그룹전과 그 이듬해 드로잉센터에서 열린 그룹전에 발탁됨으로써 뉴욕 무대에 본격적으로 진입했다. 2007년 첼시의 모티 하산 갤러리에서 뉴욕에서의 첫 번째 개인전을 가진 그이는, 이번에는 갤러리를 옮겨 뉴욕에서 세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문지하는 미국 혼합 문화의 중층성을, 작가 자신을 둘러싼 여러 환경 요소를 동원해 유쾌하게 짚어냄으로써 주목을 받고 있다. 미국 문화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2011년에는 2월 필라델피아 패브릭 워크숍 앤 뮤지엄에서의 대형 전시회를 시작으로, 내슈빌 · 멤피스 등에서 전시 일정이 잡혀 있다. 11월에는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 계획이다.
JIha Moon 문지하는 1973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고려대 미술교육과를 졸업한 뒤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1999년 미국으로 건너가 2002년 아이오와 대학 대학원을 마쳤다. 2002년부터 해마다 개인전을 열어왔으며, 2010년 11월에는 뉴욕 첼시의 메리라이언 갤러리에 전속으로 뉴욕에서 세 번째 개인전을 가졌다. 다수의 그룹전과 레지던시에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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