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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문학

클래식 음악계의 '작은 거인' 토마스 크바스토프

(세인트앨버트 = 김상현) 토마스 크바스토프(Thomas Quasthoff)의 목소리로 말러의 가곡집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Des Knaben Wunderhorn, 1999)를 듣는다. 당대의 최고 메조 소프라노인 안네-소피 폰 오터가 듀엣으로 나오고,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베를린 필이 반주를 맡았다. 

크바스토프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고 서정적이면서도 카리스마에 넘친다. 벨벳처럼 아름다운 목소리, 섬세한 감정 표현, 교과서처럼 정확하고 선명한 발성, 마치 숨쉬듯 자연스럽게 넘실대는 리듬감, 희로애락 감정의 변화가 절절하게 생동하는 톤, 오케스트라와 오래된 연인 사이처럼 기막히게 끌고 당기고 채며 일구는 화음, 이음매가 느껴지지 않는 절묘한 타이밍...이보다 더 기막힌 말러가 또 있을까! 그의 베이스-바리톤 목소리는 마치 제 목소리의 8, 90%만 내는 것처럼 늘 여유가 있다. 그래서 목소리의 울림도 더 넉넉하고 맑고 담백하다.

음반만 듣고 크바스토프를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나 플라시도 도밍고 같은 훤칠하고 당당한 체격의 성악가로 연상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겠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상상과 하늘과 땅 사이의 거리 만큼이나 멀다. 그는 난쟁이이다. 키는 132cm밖에 안된다. 그뿐이 아니다. 그에게는 팔이 없고, 다리도 허벅지 부분이 없다. 손은 마치 물고기의 지느러미처럼 몸통의 양옆에 붙어 있다. 그것도 일곱 손가락뿐이다. 처음 그를 보는 사람은 누구라도 헉, 하고 놀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저런 몸에서 어떻게 저런 목소리가 나올까 경탄할 수밖에 없다.

그가 그렇게 불구로 태어난 것은 그 어머니가 임신때 입덧을 줄이려 복용한 '탈리도마이드'(Thalidomide)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의 지능과 목소리는 그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그를 정상인처럼 키우기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한 부모와, 그를 누구보다 아껴준 형이 있었다. 

클래식음악계의 '작은 거인' 토마스 크바스토프 (이미지 출처: PRI)

아마존 킨들로 크바스토프의 회고록 '목소리'(The Voice)를 읽었다. 아니, 앞에 붙은 'the'의 의미까지 고려해야 번역한다면 '신이 내린 목소리', 또는 '선택받은 목소리'쯤으로 번역해야 옳겠다 (내 번역도 물론 상식선을 넘지 못하지만 '빅맨 빅보이스 - 세상에서 가장 작은 성악가'라는 한국 번역본의 결론은 더욱 실망스럽다. 고민 끝에 만든 제목이겠지만 구태의연하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빅맨 빅보이스'라는 되도 않는 영어식 제목을 내세운 것은 더더욱 못마땅해 보인다.)

크바스토프의 회고록은 밝고 긍정적이고 당당하다. 어린 시절의 고난, 부모의 눈물겨운 희생, 사회의 냉대와 차별 같은 어두운 대목이 분명히 들어 있지만 여전히 전체적인 톤은 희망차다. 음악가로서는 물론 한 인간으로서도 거의 모든 것을 성취했다는 자부심과 긍지와 만족감이 물씬 풍긴다. 읽는 동안 자주 던진 '크바스토프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라는 질문은 나만의 어쩔 수 없는 병통이었다. 

이 회고록에서 또 한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크바스토프의 높은 지적 수준이다. 음악가로는 먹고 살 것 같지 않아 잠시 법학을 공부했다는 데서도 그의 기본적인 지력은 드러나거니와, 방대한 독서로부터 얻은 폭넓고 전문적인 지식은 회고록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에 대한 그만의 해설과 의견도 경청할 만하고, 다른 성악가, 연주가, 지휘자 들에 대한 그만의 솔직한 평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클라우디오 아바도에 대해: "아바도에게는 그의 음악적, 지적 진실성(integrity)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권위가 있다. ... 그가 지휘대에 설 때에는 지휘하려는 악보에 대한 모든 문헌 분석과 연구로 종합적이면서도 참신한 시각을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그게 19세기 클래식 레퍼토리든 20세기초 음악이든 혹은 슈톡하우젠, 베리오, 혹은 노노 같은 현대작곡가의 작품이든 마찬가지이다. 당대에 그만큼 넓은 레퍼토리를 가진 지
휘자는 달리 찾기 어렵다. 어떤 음악을 지휘하든 아바도는 명징한 음악적 구조와 목소리의 방향성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한다. 탁월한 연기술과 몸짓으로, 그는 다른 지휘자들이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마치 보이지 않는 상대와 펜싱하듯 지휘봉을 휘둘러야 하는 메시지를 단 한 번의 눈짓만으로 전달한다."

사이먼 래틀에 대해: "아바도로부터 베를린 필의 배턴을 물려받은 사이먼 래틀은 대중으로부터 주목받는 것을 즐긴다. 그는 대단한 카리스마의 소유자이다. 그의 지휘 자세를 보면 늘 왼손을 오케스트라쪽으로 향해 열어 보이는데 이는 마치 '나는 모든 것에 대해 열려있으니 여러분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한 정신으로, 그는 청중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게 만들 만한 에너지를 오케스트라로부터 이끌어낸다. 그와 동시에 사이먼은 친절하고, 감성적이고, 매우 지적이며, 하늘 아래에서 아마도 가장 유머러스한 음악 천재일 것이다."

앙드레 리우, 보첼리, 바네사 메이 류(類)에 대해: "물론 상관없다. 어차피 세상에는 어떤 종류의 쓰레기든 들어설 공간이 있으니까. 하지만 이들 딴따라들이 예술가로 오인되어서는 결코 안된다. 그저 잘 숙련된 기능사인 이들의 상품이 '클래식음악' 딱지를 달고 팔리는 것은, 진지한 예술가들이 그들의 능력에 따라 인정받을 기회를 박탈하는 일종의 '상표 사기'이다."

크바스토프는 직설적이다. 세상 일에 대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약간은 냉소적으로 한 마디 던지기도 하고, 때로는 투사처럼 논쟁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 자신의 생각을 명료하게 개진한다. 눈물겹게 고난스러웠던 옛일을 따라가며 손수건을 적시리라 기대했던 이들이라면, 자신의 개인사 못지않은 비중으로 들어 있는 음악과 정치, 사회에 대한 그의 논평에 다소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도리어 더 마음에 들었고, 크바스토프라는 인물을 단지 '타고난 목소리로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성악가'로만 알고 있던 내 생각의 지평을 크게 넓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가 얼마나 다층적이고 심오하며 풍요로운 인물인지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다.

책 뒤에 붙은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보니 미처 들어보지 못한 음반이 부지기수다. 토마스 크바스토프와의 책을 통한 대화는 막을 내렸지만, 음반을 통한 흥겨운 음악 여행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마음이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