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부작 안쪽의 미니시리즈를 떼기도 버거울 판에 이건 아니다 싶었으나, 대하소설을 읽는다는 생각으로 노트북에 달라붙었습니다. 노트북 사용을 두고 시간 다툼을 벌이는 딸아이에게는 '역사 다큐멘터리'를 본다고 우겼습니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크게 두 가지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첫째는, 요즘도 한국에서 많이 이야기되고 있는 정권의 방송 장악. 나는 한국에서 특정 정파가 권력을 잡으면 하게 되는 것이 이른바 '방송 장악'이라고 생각합니다. 방송을 장악했다고 반대파들은 말하지만, 지금 권력을 잃은 이들도 권력자였을 당시 똑같이 했다는 사실을 드라마를 보면서도 느끼게 됩니다.
드라마에서 유독 강조되는 대목은, 이순신은 원칙주의자이고 기존의 공고한 권력과 기득권에 맞서 목숨을 걸고 소신과 원칙을 지켜나간다는 내용입니다. 이순신의 변함없는 애국심과 충성심을 의심하고 흔드는 이들은 기존 권력의 핵심인 임금과 일부 정파입니다. 전쟁에 나간 이후 이순신의 충정은 그 공고한 권력과 기득권 세력에 의해 왜곡되고, 이순신은 몸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핍박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 원칙을 끝까지 지켜나가 끝내 승리합니다.
위의 이순신이라는 이름에 노무현을 써넣으면 어떻습니까? 그리 틀리지는 않은 듯 싶소이다만...사극 풍으로...
이순신은 기존의 룰을 깨는 혁신을 단행하여 크게 반발을 삽니다. 양반가의 자제들을 군대에 끌어오는가 하면, 능력이 있다면 천출도 군관으로 발탁합니다. 능력 위주의 인사와 실용성을 강조합니다. '판에 박힌 관념과 구습과의 싸움에 목숨을 걸었다'고 마지막 편에서 나레이터는 말합니다. 이쯤 되면 '현 대통령 찬양 드라마'라 불러도 손색이 없습니다.
과거 박정희 정권 때 '보라,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그의 모습...'이라는 노래까지 달달 외게 하며 찬양토록 했습니다. 은연중 이순신과 박정희를 오버랩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불멸의 이순신'을 보면서, 노무현판 이순신 찬양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정권 담당자가 방송, 그 가운데서도 정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할 수 있는 공영 방송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은 한국의 어느 정권에서도 그렇게 해온 '전통'이니 이해해 줄 만합니다.
정권 홍보 혹은 찬양과는 무관하게, 섬뜩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자살'입니다.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가 나오기 이전에도 이순신의 자살설이 있어왔으나 그 설이 세간에 널리 알려져 거의 정설이 된 것은 '칼의 노래' 이후일 것입니다. 김훈은 이순신이 자살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당사자의 심정을 정밀하게 탐색, 묘사했습니다.
'전후 조정에 가면 어차피 죽을 목숨, 전장터에서 죽자'는 것입니다. 살아도 죽고 죽어도 죽는 것이니, 살아 죽으면 더러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니(드라마에서는 '역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깨끗하게 죽자는 것입니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으나, 살자고 하지 않고 죽으면 영웅이 되는 처지였습니다.
묘하게도 노무현은 '칼의 노래' 탐독자였습니다. 탄핵 당시 그가 '칼의 노래'를 읽고 있다 하여 김훈의 소설은 2차 대폭발을 하게 됩니다(1차는 '느낌표!'). 노무현이 대통령이 된 날, 그것이 불만스러워 기자직을 떠난 작가에게 큰 선물을 안긴 셈입니다.
대통령에서 물러난 노무현 또한 조정에서의 이순신처럼 온 천하가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만약 그가 살아 있었다면 정치적으로 어떤 험한 꼴을 당했을지, 작금에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드라마 내내 노무현의 원칙과 철학, 그리고 기득권 세력에 핍박받는 모습이 그려지더니, 그 결말마저 똑같습니다. 드라마가 현실이 된 건지, 현실이 원래 드라마 같은 것인지, 참 헛갈렸습니다.
몇년이나 지난 드라마를 보면서 이렇게 뒷북을 칩니다. 외국에 살아서 그러니 용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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