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토=성우제)이곳 토론토에서도 "미실이 빠진 후 선덕여왕을 보지 않는다"는 시청자가 속출했습니다. 미실의, 미실에 의한, 미실을 위한 드라마가 선덕여왕인데 더이상 무슨 재미로 보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이른바 한류가 외국 사람들에게도 통하는 마당에, 외국에 사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어떠할까 하는 것은 이제 이야기 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한국 대중문화, 그 가운데서도 특히 드라마에 대한 반응은 한국과의 시차조차 거의 없습니다.
토론토에서도 선덕여왕의 시청률이 뚝 떨어졌습니다. 누구라 해도 미실이 빠진 것을 두고 "김샜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대를 않고 봐서 그런지는 몰라도, 선덕여왕이 솔솔 재미나더니, 내 눈에는 미실의 죽음이라는 분기점 이전보다 지금이 훨씬 더 재미있습니다.
분기점 이전에는, 극 자체가 참 단조로웠습니다. 미실이 권력과 인재를 장악했다고 하지만, 내 눈에는 그건 말뿐이었습니다. 덕만이 등장한 이후, 덕만 팀과의 대결에서 미실 팀이 단 한번도 이긴 적이 없습니다. 서라벌의 그 막강한 인재들이, 시골에서 막 상경한 촌뜨기들한테 늘 당하는 형국이었습니다. 선과 악의 이분법이 너무도 분명하여, 덕만은 무엇을 해도 착하고 미실은 무엇을 하든 악했습니다. 미실이 악하지만은 않다는 대목은, 마지막 딱 한 장면에 나옵니다. 국경을 지키는 군인들을 정권을 찬탈하는 데 동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2·12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노태우 씨 등과는 바로 이 점에서 달랐습니다. 미실을 시청자들에게 '영웅'으로 각인시킨 구국의 결단인 셈입니다.
선악의 그 단조로움을 깨면서 극적인 재미를 살린 유일한 것이 바로 미실 개인의 카리스마였습니다. 덕만조차도 미실에게 배워서, 미실의 방법을 동원해 미실을 제압합니다. 미실이 1979년 누구처럼 전방의 군대만 빼돌렸어도 선덕여왕은 없습니다. 그만큼 통이 큽니다. 유신은 미실의 아들 비담에게 말합니다. "얌마. 네 엄마 반만 닮아라."
미실은 선덕여왕의 지존이었습니다. 사람 같지 않은 영웅 그 자체였습니다. 영웅 하나가 태양처럼 떠 있고, 그 영웅에게 대적하는 식으로 스토리가 전개되어가니, 재미있는 듯하면서도 이야기 자체는 뻔하고 지루했습니다. 어차피 권력 싸움인데 덕만 팀은 늘 선하고 순수하고, 미실 팀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악하고 비루하게 그려졌습니다. 지위와 능력으로만 따지자면 당대 최고의 군인이자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소중하게 여기는 설원랑이 미실의 정부이자 쿠데타 음모가쯤으로 비쳐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미실의 죽음 이후 분위기는 확 바뀌었습니다. 절대 강자가 사라지자 바야흐로 포스트 미실이 되기 위해 춘추전국시대가 열린 셈이지요. 그 한 축이 유신을 2인자로 거느린 선덕여왕이고, 그 반대편이 비담이 이끄는 미실파입니다.
극이 더 재미나는 이유는, 한 사람의 절대 강자 때문에 힘의 균형이란 게 없던 미실시대와 달리 지금은 선덕과 비담 팀 사이에 힘의 균형이 팽팽하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사람도 미실과 같은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가지지 못합니다. 과거의 싸움이 헤비급과 플라이급의 대결이었다면, 지금은 밴텀급으로 체급을 올린 플라이급 출신의 고만고만한 선수들끼리 닭싸움 같은 난타전을 벌이는 형국입니다. 게다가 이 권력 싸움에는 '정분'까지 끼여들어, 삼각관계가 형성되니 어찌 더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세 남성 가운데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비담입니다. 비담은 연모하는 여인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떨 줄도 알고 싸움도 유신보다 훨씬 잘 합니다. 문제는 선덕의 마음이 유신에게 가 있다는 것뿐입니다.
아, 불쌍한 비담. 엄마를 닮아 섬세하고 감정 풍부한 비담은 오매불망 선덕만 쳐다보는데, 선덕은 무식하고 연애 감정이라고는 없는 유신에게만 눈이 가 있습니다. 단순 무식한 유신은 그 마음도 모른 채 "신국을 살리네, 마네" 하면서 감옥에 갇혀서도 지도만 그리고 있습니다. 선덕은 비담에게 (마음을) 줄듯 말듯 하면서 비담을 시험만 하고 있습니다. 답은 정해져 있으나 참 재미나는 삼각관계 아닙니까?
결국 분위기는 유신을 영웅으로 만들면서 비담을 치는 쪽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비담이 뭘 잘못했다고…. 결국 유신에게 마음이 가 있는 선덕 그 '요망한 것'이 결국 주지도 않을 거면서 줄 듯 말 듯하며 약만 올리니 칼을 빼든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비담이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선덕의 남편 혹은 애인 자리를 두고 비담과 유신이 맞짱 한번 뜨게 하는 게 훨씬 공평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만….
야심을 품었으면서도 사랑 앞에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는 감성의 소유자. 비담은 내게 이렇게 비칩니다. 그래서 매력적이고, 이 매력적인 인물이 유신이라는 힘밖에 없는 '군발이'한테 당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역사가 그렇게 되어 있다니, 별 수는 없겠지만서도….
이런 재미도 있지만, 선덕 자체를 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미실은 손자를 둔 할머니였으나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미실의 카리스마를 떠받친 가장 유력한 장치가 바로 이 매력이었습니다. 바로 그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선덕여왕에게서도 솔솔 풍겨나온다는 것입니다. 비담이 떨리는 손으로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려 하는 찰라 "손 치우거라!" 하는 한 마디. 게다가 비담이 포옹을 했을 때 거부하지 않고 몸을 맡기는 광경. 작가는 미실이 온전히 점유하던 바로 그 여성을서의 매력을 선덕여왕에게 넘겼고, 선덕은 그것을 잘 소화해냅니다. 낭도 시절의 덕만에게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매력입니다.
미소년 춘추의 살인 미소, 죽방과 고도의 벼락출세와 변신 등 미실의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던 자잘한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재미는, 거론을 하자면 날밤을 샐 수도 있겠습니다. 미실이 죽었다고 시청률이 떨어졌다고 하는데, 나는 훨씬 더 재미나게 보고 있습니다.
계백을 보면서 느닷없이 박중훈을 떠올리는 것도 재미납니다. 의자왕이 "계백아" 했더니, "야" 하고 대답하는... "계백아 네가 거시기해야 쓰것다" 하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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