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비로소 이 책을 다 읽었다. 저자 후기까지 보고 나니, 세상에 뭐 이런 책이 다 있나 싶다. 나름대로 사진가 강운구를 남들보다는 조금 더 안다고 생각했으나 내가 아는 강운구는 강운구의 10분의 1쯤이나 될까 말까 하다.
작가로서 살아온 그 오랜 세월을 사진이 아닌 글로 보인 셈인데, 그의 작품을 보는 듯 눈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든다. 결국 당신의 사진하는 자세와 방법론을 피력한 그동안의 글을 거의 모은 책이다. 나는 나의 대학 은사이신 강성욱 선생님을 도처에서 떠올린다.
두 분의 가장 큰 공통점은 후학들에게 늘 "기본에 충실하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는 것이다. 쌀로 가장 잘 지을 수 있는 것이 밥인데, 맛나는 밥부터 지을 생각은 안하고 술 빚고 떡만 만든다고, 사진가 강운구는 매를 든다. 그것도 아주 무섭고, 매섭게... 매섭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좋은 후학이 아닐 것이다.
강성욱 선생의 레퍼토리는 늘 "따져보거라"였다. 아주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보들레르냐, 보들레에르냐를 따져보라 하고 시 한 편을 가지고 한 학기 수업을 했다. 그것도 학부 수업이다. 공부의 기본을 가르치셨던 분이니, 대학에서 익힌 기본기는 이후의 삶에도 참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리포드 10장을 써오라 하고는, 한 줄만 넘쳐도 A가 B로 가차없이 변했다. 무자비했다.
두 분의 작업 혹은 학문 방법론이 보수적으로 비칠 수도 있겠으나, 내가 보기에 그 스타일은 대단히 진보적이고 리버럴하다. 요즘 세상에 과거의 보수적인 방법론을 평생 고수하는 이들은 없다. 한 시대를 압도하는 경향 혹은 유행이, 기본을 다진 다음 새롭고 현란한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니, 어느 분야에서든 주류는 바야흐로 밥이 아니라 쌀로 만든 과자나 떡인 세상이다. 노래도 못하는 애들이 가수라고 설치는 세상을 생각하면 딱이다. 주류가 그러한 세상에서, 쌀로 밥부터 지어야 한다는 주장이 진보적일 수밖에…. 고리타분이 고리타분하게 여겨지는 세상에서 고리타분한 말을 고리타분하게 고리타분한 줄도 모르고 계속하고 있으니 진보적이다.
강운구의 진보적인 면모는 그의 작가 비평에서 두드러진다. 홍순태 한정식 육명심 이갑철, 또 임응식에 이르기까지 강운구는 거침없이 칼날을 들이댄다. 칼날은 기본에 관한 것이어서 날카로운 데다 제대로 찌른다. 아작을 내거나 작살을 내거나, 작신 두들겨팬다('작'자가 들어가면 왠지 모르게 통쾌하다). 개인전에 나온 프린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전시장에서 작가에게 대놓고 말한다.
그런데 느닷없는 소리가 나도 모르는 새 새어나갔다. 볼멘톤으로.
"갑철씨는 친구들도 없어요?"
"무슨 말씀이신지…요?"
"프린트를 이렇게 해서 걸어도 뭐라고 말리는 친구도 없었냐고요."
"…아, …예."
이때 몇 사람 건너의 누가 이갑철을 불렀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지금 적으면서도 웃음이 나온다. 강선생의 억양과 표정이 선명하게 잡힌다. 주류 중에서도 그 한 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에게, 누가 저렇게 대놓고 기본에 관하여 쏘아붙일 수 있는가. 아무도 하지 못하고 하려고도 하지 않는 일을 당신 혼자 하고 있으니 진보적이라는 얘기다. 책 마지막의 대담에서, 대담자로 나온 이른바 교수라는 자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듯 보인다. 내가 보기에, 기본이 뭔지도 모르고 망신도 아주 개망신을 당한 자리였는데 그것을 정리한답시고 세상에 내놓았으니...
시각 예술쪽 작가들을 만나보면, 글을 잘 쓰는 부류가 있고 못 쓰는 부류가 있다. 잘 쓴다는 것은 미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생각과 작업에 대해 쉽고 일목요연하게 표현할 줄 안다는 의미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작업에 대한 생각이 확실하게 정립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이론' '방법론' 따위의 거창한 말이 아니라, 그냥 생각이다. 그 생각을 글과 말로 쉽게 풀어낼 줄 아는 사람이 좋은 작가라고 나는 생각한다. 쉽게 풀어내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가 지금 뭘 하는지조차 잘 모르고 있을 경우가 많다. 자기도 모르고, 남도 모르니, 세상에 아는 이 하나 없다. 그러니 좋은 작품이 될 리 만무하다.
그런 점에서, 강운구 선생은 글을 잘 쓰는 사진가가 아니라 사진가로서 글을 잘 쓰는 분이다. 작업에 대한 생각이 저토록 명확하고 구체적이니, 글은 잘 나오게 되어 있다. 머리가 혼란스러운 게 아니라 맑다는 얘기이다. 번민과 고민과 고통의 산물이다. 남들보다 더 죽으라 하고 길을 찾으니 그 길이 곧 반듯한 글로 보인 것일 뿐이다. 물론 작업에 일차적으로 나타났고.
예술 이론서를 이렇게 쉽고 재미나게 읽기는 처음이다. 아니, 지금까지 이런 예술론이 없었다(고 말하기가 뭣 한 것이, 내가 읽은 책이 몇권 안되기 때문이다). 일독을 권한다.
저자 후기를 보니, 책 디자인을 정병규씨가 했다. 재미나는 것은 정병규씨가 위에서 말한 강성욱 선생의 제자라는 점이다. 대학에서 얼마나 영향을 받았는지 모르겠으나...지난번에도 지적했는데, 사진 한 장 없는 사진론 책을 만들면서, 디자인 또한 독자를 참 불편하게 한다. 그런데 사진 한 장 없어도 재미있고, 불편하게 해도 그 재미 때문에 오히려 멋있어 보인다.
오자는 딱 하나 발견했다. 우리나라가 우리나리로 된 것이 하나 눈에 띈다.
이 책에 이런 게 왜 들어갔나 싶은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뒷 편에 붙은 두 가지 대담이다. 강운구 선생이 육성으로 당신 사진론을 들려주는 것이니 의미가 있겠으나, 대담을 나누는 다른 이들의 말투나 질문이 이 책에서 보자면 '걸작'이다. 원본을 훼손할 수는 없으니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두었을 것이다. "나는 강운구를 몰라요"라고 만방에 고하는 개떡 같은 대목을 소개하면...
작업실 창가로 스민 빛에 드러나는 선생님(강운구)의 얼굴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노인도 저 정도면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 필자는 이런 표현이 멋지다고 생각하여 썼을 것이다. 충분히 아름다운 것은 어떻게 아름다운 것인가? 지(저)보다 더 젊게 생각하는 작가를 보고 노인이란다. 나이 많다고 다 노인인가? 몇살 이상이 노인인가? 나는 저런 시각이 참 멋지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진가의 제작의도가 자신의 훈련된 시각을 기준으로 한 것인지, 아니면 역으로 대중의 보편적인 시각규준을 기준한 것인지는 좀 더 많은 논의를 해보아야 할 사항이겠으나, 일반적인 의사소통 수단인 언어의 형태와는 전혀 다른 의사전달 매체를 가지고 자신의 여하한 생각을 타인에게 전달하려고 할 때 겪게 되는 소통구조의 불합치성은 내내 그 제작의 기준과는 별도로 하나의 문제로서 남게 마련이다. 이 문제 속에는 단순한 형식적인 전문성뿐만이 아니라, 제작의도와 목적에 수반되는 집중된 사고집적은 그것이 아무리 대중성에 그 기준을 두었다 하더라도 상당 부분 혹은 상당 시간 동안의 해석요구를 필요로 하게 되리라 본다.
: 난 강운구와의 대담을 옮기는 편집자 주에서 이런 식으로 일관되는 글투를 읽지 않으면 안되었다. 강운구의 육성을 듣기 위해서 그랬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참 알아듣기 어렵다. 스트레이트 사진에서 주장하는 바가 뭔지, 왜 강운구와 대담을 하려 하는지도 잘 모르고, 강운구라는 이름 보고 대뜸 대담하자고 덤벼든 것 같다. 떼로 덤벼서, 겁이 나서 강선생은 응한 것 같다. 이런 걸 왜 이렇게까지 옮겨썼는지, 내가 갑자기 무지몽매하다는 생각이 든다.
짧게 쓰려 했는데 길어졌다. 독자들에게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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