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다 노출을 단속하겠다'는 뉴스(http://www.newspost.kr/news/articleView.html?idxno=14899)를 보니 1970년대 초중반의 기억 한 점이 떠오른다. 이른바 혼분식이다.
촌에서 올라온 우리 집은 고향집에서 조부께서 부쳐주시는 곡식을 먹었다. 굳이 서울에서 돈 들여 곡식을 살 필요가 없었다. 1974년 초딩 5학년 때. 학교에서 요구하는 혼식은 보리나 잡곡 30%, 아니면 분식(빵)이었다. 당시 양식을 사서 먹는 아이들 도시락은 노란색이었다. 이상하게 서울에서 사먹는 보리는 노란색이었고, 우리 촌에서 가져다 먹는 보리는 흰색이었다. 쌀과 잘 구별이 안 되었던 거다.
쌀, 보리를 반반 정도 섞어 도시락을 싸가도 내 도시락은 늘 걸렸다. 담임은 흰색 보리를 혼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것도 보린데요?"라고 항변하면 개긴다고 꿀밤 한 대만 추가할 뿐.먹는 걸 가지고 두들겨 패기는 뭣했던지, 담임은 점심시간에 벌을 주었다. 도시락은 물론 먹지 못한다. 벌이 무지막지하다. 복도에 나가 '원산폭격' 하기. 지나가던 다른 반 선생님들이 발로 차서 쓰러지게 하는 건 견딜 만한데, 다른 반 여자 애들이 지나가며 웃는 것은 참기 어려웠다. 진실로... 너무 쪽팔렸다. 배 고픈 거보다 더 서러웠다. 차라리 세게 맞고 도시락 먹는 게 훨 나았다.
어리지만 그래도 '존심'이 살아 있었던지 집에 가서 말하지 않았다. 보리를 보리로 봐주지 않는 담임에게 나름 항거하고 싶었다. 어떻게? 등교를 하면 다른 애들이 자습하는 시간에, 나는 도시락 뚜껑을 열고 보리쌀을 뒤집었다. 아주 열심히. 미끌미끌한 보리쌀을 잘 뒤집어 검은선이 보이도록. 그 검은색 선으로 혼식을 증명하리라 하고...
그랬더니, 이번에는 담임이 색다른 무기로 공격해왔다. 검사를 하는 중에 내 숟가락을 들더니 밥을 푹 파서 뒤집어보는 거다. 위에만 보리를 깐 게 아닌가 하고... 그러는 담임 선생이 가련해 보였다. 초딩 5학년쯤이면 이런 감정 가질 수 있다. 가련에 비루해보이기까지 했다. 연민을 가지니 선생이 별로 밉지는 않았다. 40대 남자 선생님이 왜,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했을까, 지금도 의문이다. 위에서 너무 쫀 게 아닌가 생각한다.
이건 그때 그런 식으로 교육을 받은 한 가지 예에 불과하다. 국민교육헌장 외기, 국기에 대한 경례하기 등등 수없이 많다. 아, 대통령이 직접 만들었다는 노래도 있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 노래를 베낀 거라더만... 백두산의 푸른 정기, 어쩌고 하는. 가사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생각난다. 2절도 생각나는군. 조기교육의 효과는 이렇게 크다. 게다가 맞아가며 배웠으니까. 그리고 새벽종이 울려야 새 아침은 밝았다. 맨날 그 노래를 들으며 등교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혼식과 관련해 받은 충격 두 가지.
첫째. 교장 교감까지 들이닥친 불시의 혼식 조사가 첫 교시에 있었다. 부반장인가 하는 애가 걸렸다. 그날따라 김밥을 싸왔는데, 밥에 깨만 섞였을 뿐 보리가 없었다. 다른 선생님들이 우루루 나가고 난 다음, 열 받은 담탱이가 바로 들어왔다. 영어를 가르치는 여선생. 다짜고짜로 부반장 얼굴을 손바닥으로 짝~ 짝~. 코피가 났는지, 땀이 튀었는지, 어쨌든 액체가 튀어 내 쪽으로 날아왔다. 고운 여선생은 얼굴이 벌개져서 몇 대를 더 갈겼고, 부반장도 맞아서 얼굴이 벌개졌다.
담탱이가 나가자 부반장은 자리에 앉더니 바로 도시락을 꺼냈다. 그리고 입이 터지게 먹었다. 그런 장면을 그로테스크라 부른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그로테스크 하면 나는 본능적으로 그 장면을 떠올린다. "저 새끼, 맞아서 돌았나" 하고 보는 우리를 향해, 그는 씩 웃더니 한 마디 던졌다. "오늘 내 생일이야. 울 엄마가 특별히 싸준 거거든." 그 애는 부잣집 애가 아니었다. 김밥은 소풍 빼고, 1년에 한 번 먹을까 말까 한 특별식이었다.
둘째. 유신시대가 극악해질수록 혼식 장려도 심해졌다. 난 나중에 아예 보리밥을 싸달라고 했다. 어느 날 점심시간에 교무실에 갈 일이 있었다. 담탱이가 불러서. 충격적인 장면. 못 볼 것을 보고야 말았다. 선생님들이 도시락을 먹고 있는데, 하나 같이 하얀 쌀밥이었다. 학교 선생님들더러 "개새끼, 썅년 들~"이라고 부른 게 처음이다. 물론 속으로... 이런 욕은 잘 하지 않았고 또 못했는데 그냥 조건반사처럼 자동빵으로 떠올랐다.
더 놀란 사실은, 내가 보고 있는데도 아무도 부끄러워 하거나 도시락 뚜껑을 닫지 않고 당당하게 먹는다는 거였다. 우리는 쌀밥 도시락은 무지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해서는 안 되는 숨겨야 할 것이라고 여겼더랬다. 아니, 그렇게 여기게끔 가르친 장본인들이 그들이었다. 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 앞에서, 벌건 열무김치 이빨로 뚝뚝 잘라가며 쌀밥을 입으로 푹푹 퍼넣는 장면. 이 또한 매우 그로테스크.
고등학교는 초중학교와 달리 비교적 리버럴한 사립에 진학. 박통이 죽은 해에 들어갔는데, 그 누구도 혼식을 강요하지 않았다. 초딩 때부터 짓눌러온 혼식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 괜히 불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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