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산 풍속화에 서양이 반했다
캐나다 왕립박물관, 한반도가 낳은 '가장 세계적인 화가'
김준근 특별전 열어
이름 김준근. 호 기산. 생몰연대 미상. 구한말 풍속화가. 김준근에 관해 한국에서는 이 정도 정보밖에 없겠지만, 서양에서 그는 가장 유명한 조선의 풍속화가로 알려져 있다. 1895년에 이미 서구에서 개인전(독일 함부르크 민속박물관)을 열었으며 연구서만 해도 수십 권을 헤아린다.
미국스미소니언 박물관, 독일 뮌헨 민속박물관, 영국 대영박물관, 영국도서관, 프랑스 기메 국립박물관 등 그의 작품을 수백 점씩 소장하고있는 박물관의 면면만 보아도 ‘한반도가 낳은’ 가장 세계적인 화가로 꼽힐 만하다.
기산 김준근이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왕립 온타리오 박물관(ROM : www.rom.on.ca)에서 새로운 면모로 재탄생했다. ROM이 1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들여 진행 중인 재건축 프로젝트(르네상스 ROM)를 기념하는 ‘대표 선수’로 선발되어 특별전을 열고 있는 것이다. 제목은 ‘1900년대의 한국:기산의 풍속화’.
지난 12월26일 2년 만에 다시 문을 열어 캐나다 미술 애호가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동아시아 갤러리의 특별 전시실에서, ROM이보유한 기산의 작품 28점이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삼성전자후원으로 이루어진 이 특별전은 오는 9월4일까지 계속된다.
사진처럼 생생하게 재현된 구한말 풍경
기산은 구한말 부산·인천·원산 등 개항장을 중심으로 활동한 풍속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곳에서 만난 외국 선교사나 외교관 들이 주문한 작품을 주로 그렸다. 외국인들은 귀국 기념으로 가져갈 작품을 기산에게 의뢰했으며, 그는 종이 위에 구한말의 사회 풍속을 사실적으로 옮겼다. 기산의 작품은 그림 엽서와 같은 구실을 했을 뿐만 아니라, 연날리는 모습, 쟁기질 하는 모습 등 구한말의 풍경을 사진처럼 생생하게 재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수묵으로 그린 작품도 간혹 눈에 띄지만 작품은 대다수가 화려한 채색화이다.
전세계유명 미술관에 산재한 수천 점에 이르는 기산의 작품 중에서도
이번에 ROM이 공개한 작품은 좀더 특별하다.
우선, 작품이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다른 미술관들
이 소장한 작품은 대부분이 15×20cm의 소품이었다. 이와 달리ROM
의 소장품은 71×123cm로 기산의 작품가운데 가장 크다. 작품 자체가 크다 보니 기산의 장기, 곧당대의 풍경이 훨씬 선명하게 살아나고 있다.
다음은, 기산의 작품 28점 가운데에 한반도 지도가 들어 있고, 작품들이 무엇을 발표할 때 사용하는 궤도 형태로 묶여 있다는 것이다. 이로미루어보아 ROM의 기산 작품은 한국을 캐나다의 대중에게 소개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ROM 동아시아 담당 수석 학예연구사 클라스 루덴비크 박사와 함께 한국관 및 기산 특별전을 기획한 한희연씨(토론토 대학 대학원 박사 과정·동양미술사)는 “기산의 작품은 조선사회 모습을 짤막한 설명과 함께 소개하는 슬라이드 쇼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라고 소개했다. 한씨는 기산 특별전의 도록을 함께 제작했으며, 연구 성과를 담은 논문을 발표했다.
기산의 작품이 좀더 각별한 세 번째 이유는, 캐나다 출신인 제임스 스카스 게일(1863~1934)과의 관계 때문이다. 토론토 대학을 졸업한 게일은 한국 최초의 서양문학 번역서인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번역한 주인공. 기산은 원산에서 출판된 이 책에 삽화를 그렸다. 이번전시에는 <천로역정>의 원본도 함께 나와 있다.
기산 특별전 전시장에서 만난 미국인 세실리아 구엘레트씨는 입양한 한국 출신의 딸과 함께 기산의 작품을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8세가 된 딸아이에게 한국의 아름다움을 알려주기 위해 일부러 이곳을 찾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워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위의 기사를 송고할 당시만 해도 분위기가 참 좋았다. 한국 중국 일본관이 나란히 위치한 동아시아관 개관 특별전으로 우리의 <기산 김준근 전>을 9개월씩이나 한다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었다(전시는 더 연장되어 1년 가까이 진행되었다).
한국 박물관이 기획한 전시회가 외국 박물관 순회 전시를 연 적은 더러 있었으나, 외국 박물관이 내부에서 발견한 한국의 그림을 가지고 특별전을 열었으니 가슴이 벅찬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기산 특별전을 하면서 ROM이 펴낸 도록 겸 연구서. 책자를 예쁘고 정성스럽게 잘 만들었다.
너무 좋은 나머지 마가 낀 것일까?
나는 동아시아관의 한 복판에 있는 기산 특별전을 보면서 자꾸 지도가 거슬렸다. 19세기말 서양에서 만든 지도책을 모사해 그린 한반도 지도 그림이었는데, 거기에 'East Sea' 대신 'Sea of Japan'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서양 사람들 눈에야 그 차이가 보일 리 없겠지만, 독도를 두고 일본이 자꾸 싸움을 걸어오는 판이라 우리 눈에는 거슬릴 수밖에 없다.
기산의 작품첩 안에 들어 있던 지도 그림은 전시장의 맨 앞에 걸려 있었다. 한국이 어떻게 생긴 나라인지를 알려주겠다는 의도 같았다.
프리뷰 시간을 이용해 전시장을 찾았던 토론토 한국 총영사관 관계자들이 이 그림을 보고 ROM의 담당자에게 항의를 했다고 한다. 항의의 내용은 두 가지.
첫번째. 한국관이 왜 이리 작고 또 구석에 위치해 있는가.
두번째. '일본해'라고 적힌 지도 그림에 대해….
ROM은 두번째 문제에 대해, 그림 옆에 설명 문구를 달았다. 'Sea of Japan은 현재 East Sea라고도 불린다'는 중립적이고 건조한 설명 문구였다.
원래 전시물 교체는 6개월 후에 할 것이라고 했지만, 이 지도는 한국 총영사관의 항의도 있고 하니 가능하면 일찍 내릴 것이라는 후문도 들려왔다. 한국 사람이 보기에 아쉽기는 해도, 전시 기획자가 이 정도의 성의를 보인 것만 해도 '한국 외교의 개가'라고 나는 생각했다.
우리가 그러고 있는 사이에, ROM은 '일본의 달' 행사를 열어 일본관의 재개관을 자축했다. 다음은 한국의 달 차례였다.
그런데, 한국 총영사관은 의외의 초강수를 내밀었다.
'지도를 철거하지 않는 한 한국의 달에 참여하지 않겠다.' 총영사관이 참여하지 않는다면 "한국은 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보이코트였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아연실색했다. 상대의 자존심을 좀 세워주면서 실리를 챙기는 것이 외교가 아닌가 싶은데, 총영사관의 외교는 '모' 아니면 '도'였다. ROM에 한국관을 설립하기 위해 이곳의 한인 관계자들이 얼마나 오랫 동안 애를 써왔으며, 그 한국관이 한국의 위상과 진면목을 세상에 알리는 데 얼마나 큰 역할을 해내는지, 이곳 말로 "I don't care"한다는 의미였다.
총영사관의 초강수는 먹힐 리도 없고, 먹힐 수도 없고, 먹혀서도 안되는 것이었다. 캐나다의 얼굴이라는 ROM의 체면도 있는 법. 아무리 한국의 작품을 전시한다고 하나, 전시 작품은 엄연히 ROM 소유이다. 자기 작품 가지고 전시를 기획하고, 나아가 상대가 거슬린다는 문제에 대해 성의를 보였는데도 상대편이 받아주지 않고 극단적으로 가버린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길 법하다. 게다가 캐나다 사람들 처지에서 보면, 동해든 일본해든 그야말로 "I don't care"다.
한국의 달에 보이코트한 결과?
전세계 유수의 박물관보다 훨씬 좋은 기산의 작품으로 특별전을 연다고 자랑하려던 '한국의 달' 행사는 당연히 취소.
게다가 ROM은 그 지도를 애초에 예정했던 대로 6개월 동안 쭉 전시했다. 총영사관이 ROM이 보인 성의를 받아들였다면 한 달만에 내렸을지, 세 달만에 내렸을지는 모르겠으나 일찍 내려왔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림 철거"를 요구한 한국 총영사관은 결과적으로 'Sea of Japan'이 적힌 지도를, 그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며 구경하는 ROM에 더 오랫동안 걸려 있게끔 한 것이다.
한국 정부에는 "우리가 이만큼 열심히 싸웠다"고 의기양양하게 보고할지 모르겠으나 외교로는 빵점을 넘어 마이너스였다. 그 지도를 더 오랫동안 걸어두게 함으로써, 독도에 관한 한, 일본이 우리의 적이라면, 대한민국 총영사관은 결과적으로 적에에 이로운 이적행위를 한 셈이다.
이뿐 아니다. 그동안 이곳 한인들, 그리고 한국의 코리아파운데이션 등이 정성 들여 쌓아온 한국과 ROM과의 우호 및 신뢰 관계에 총영사 한 사람 때문에 금이 갔다. 나는 그것이 가장 아깝고 안타까웠다. 총영사는 다른 나라로 가버리면 그만이지만 한번 깨진 신뢰는 복원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ROM 관계자의 말을 들으니 "한국과 어떤 행사를 하고 싶어도 지금은 못한다. 총영사가 바뀌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ROM은 돈을 아무리 싸들고 간다 한들, 국가관을 쉽게 내줄 곳이 아니다. 캐나다의 얼굴인 만큼, 자존심이 세고 그 자존심을 뒷받침하는 실력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한국 총영사관이 이렇게 깽판을 놓으며 거의 탈레반 같은 행위를 하는 사이에 일본은 기업들이 돈을 모아 일본 전문 큐레이터 한 명을 채용했다. 일본 전문 큐레이터는 일본 기업들이 모은 기금으로 월급을 받으며, 일본 예술에 대한 연구와 전시 기획을 전문적으로 맡게 된다.
유물도 적고, 인기도 떨어지고, 돈도 적게 내고(ROM에 기부한 한국 기업은 삼성 1곳, 일본은 수십개), 성의를 보여줘도 화답은커녕 깽판을 놓는 한국과, 유물도 많고 인기도 많고 돈도 많이 내고 나아가 ROM에 학예연구원까지 한 명 더 채용하게 하는 일본. 이 두 나라에 대해 ROM은 어떤 생각을 하며, 대접을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전임 총영사는 남들이 정성 들여 만들어놓은 한국관과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단 한 방에 날려버리고 다음 부임지로 가버렸다. 후임 총영사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건 당신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왜 나에게 묻는가" 라고 답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담당 영사를 통해 읍소하다시피 했는데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더니, 이제 와서 뭘 어쩌라고...
ROM에서 기부금을 요구하는 것 같다고 했다. 박물관이야 당연히 기부금을 원하게 마련이다.
기부금이 문제가 아니라 한국이 크게 '호구' 잡혔으니, 한국이 국가로서 체신을 잃었다는 것, 나는 그것이 참 안타깝다. 그것이 앞으로 한국관과 한국 문화예술에 대해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하는 것은 보지 않아도 뻔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지금까지 들여온 것보다 더 큰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그나마 있는 한국관이 ROM에서 애물단지가 될는지도 모른다.
지난 5월1일 ROM은 한국 관련 전시를 실로 3년 만에 열면서 총영사 등 한국 관계자들을 초청해 '화해' 분위기를 조성했다고 한다.
탈레반처럼 막 나가지 말고 외교적으로 잘 풀어 진작에 실리를 챙겼더라면 '화해'고 자시고 할 일이 없었을텐데... 실리도 못 챙기면서, 국가 체면 구기고, 이미지 망가지고, 이게 뭣 하자는 것인지...
아, 챙긴 것 하나는 있다. "나는 이렇게 싸웠노라" 하고 한국 외교부에 보고하면서 외교관들이 자기 밥그릇 챙긴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