숯불구이 갈비는 익숙해도 숯불구이 커피는 처음 듣는 분이 많을 것이다. 한때 커피를 잘 안다고 자부하던 나도 “좋은
가스 불 놔두고 웬 숯불? 치기도 유분수지”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건 뭘 모르고 한 소리였다.
허영만의
만화 <식객> ‘소고기 전쟁’ 편을 보면 성찬이와 봉주가 좋은 숯을 구하려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좋은 숯불은 ‘재료의 잡맛을 날려버리고 고기 고유의 향을 은은히 살린다’라고 허영만은 설명한다. ‘고기’ 자리에 ‘커피’를 넣어도 딱 맞아떨어진다.
경기도 파주시 헤이리마을 1번
게이트. 마을 안쪽을 바라보면 오른쪽 언덕배기에 검은색 3층
건물이 보인다. 갤러리모자이크 건물이다. 지난해 5월1일 헤이리마을은 갤러리모자이크 1층에 새로운 명물 하나를 맞아들였다. 커피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서덕식씨(53)의 ‘칼디커피’이다. 서울 홍대 앞에 문을 연 이후 7년 만에 2호점을 열었다. 서씨는 참숯으로 커피를 볶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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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백승기
서덕식 대표가 ‘팩토리’라 부르는 칼디커피 헤이리점에서는 알코올 램프로 가열해 커피를 뽑는 사이펀 방식 커피도 맛볼 수 있다. |
서씨는 헤이리점을 ‘팩토리’라 부른다.
공장답게 칼디커피 문을 열고 들어서니 커피 볶는
기계가 가장 먼저 보였다. 오른쪽으로는 앤티크 커피 기구들이 놓여 있고, 주방에는 알코올 램프로 커피를 뽑는 사이펀 기구들이 열을 지어 서 있다. 전문 커피점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실내에는 탁자가 5개밖에 되지 않는다.
자리에 앉아 사이펀으로 뽑은 에티오피아 커피의 맑은 맛을 보고 있는데, 커피를 볶던 서씨가 사진기자와 나를 급히 불렀다. “빨리 와서 보세요.”
후지로얄 상표를 단 10kg짜리 커피 볶는 기계는, 겉보기에는
드럼통이 열을 받으며 돌아가는 일반 가스 불 기계와 비슷하다. 서씨는 드럼통 아래에 있는 숯불을 열어 보여주었다. 가스로 점화된 참숯이 파랗고 빨간 불꽃을 일으키며 드럼통 아래에서 열을 가한다. 가스로 굽는 고기와 숯으로 굽는 고기가 맛은 물론 일단 보기부터 다르듯이, 커피도 ‘숯불 볶기’가 가스 불 볶기보다 더 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든다.
“원래 커피는 가마솥에서 장작불로 볶았다. 숯으로 커피를 볶는 것은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서씨는 “참나무 숯으로 볶는 커피는 참숯 특유의 향이 스며들어 독특한 향미를 갖게 된다”라고 말했다. 일반
가스불보다 50℃ 더 높은 300℃의 숯불에서 나오는 원적외선은 커피콩 내부를 가열해 콩의 겉과 속을 똑같이 볶아낸다는 설명이다. <식객>에 나오는 숯 전문가의 말과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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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백승기
서덕식 칼디커피 대표는 1970년대 중반 부산의 한 다방에서 커피에 입문했다. 인스턴트 커피가 나오기 전, 그 시절 다방에도 ‘바리스타’(주방장)가 있었다. |
가스 불에 볶는 것보다 훨씬 까다로워
과연 참숯으로 볶은 커피의 맛은 달랐다. 일반 커피에 비해
구수하고 풍부한 맛, 곧 가마솥에서 푹푹 끓인 숭늉 같은 느낌을 주는 깊은 맛이었다. 참숯을 10cm로 토막 내 불을 붙여 가열하는 참숯 볶기는, 가스 불 볶기보다 훨씬 까다롭다. 불의 강도를 쉽게 조절할 수 없어 열을 통제하기가 어렵다.
도자기를 굽다가 한순간에 망칠 수 있듯이 고급 생두를 새카맣게 태우기 십상이다. 서씨에게 왜 어려운 길을 택했느냐고 물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내가 유일하지만, 일본 등 다른 나라에서는 많은 이들이 숯불을 사용한다. 일본에서 처음 맛보았을 때 구수하고 고소한 우리 숭늉 맛이 났다. 나에게 우선 잘 맞았고. 우리나라 사람에게 잘 맞는 것 같아 시작했다.”
서씨는 숯불 볶기뿐 아니라 커피를 뽑을 때도 남들이 번거롭고 어렵다며 꺼리는 사이펀 방식을 주로 사용한다. 2000년에 문을 연 홍대 앞 칼디커피는 사이펀의 명소로 널리 알려졌다. 유리 원통 아래에서 작은 가스램프로 가열을 하면 순간적으로 커피가 만들어지는 광경을 눈으로 직접 보고 즐기는 맛도 만만찮다. 커피의 성분을 가장 풍부하게 잘 뽑아낸다는 ‘융(천) 드립’도 칼디커피가 자랑하는 커피 내리는 법이다.
참숯 볶기며 사이펀, 융 드립 등 서씨로 하여금 남들이 가지 않는 전통의 길을 가게 하는 힘은, 1970년대 중반 ‘다방’의 주방 경험에서 연유한 듯 보였다. 그는 부산 중앙동 황태자다방에서 커피에 입문해 입대하기 전까지 일했다고 했다.
1980년대 냉동건조 인스턴트 커피(맥심)가 나오기 전, 다방은 요즘의 유행처럼 주방장(요즘 말로 바리스타)이 원두를 갈아 깔때기나 사이펀으로 내려 커피를 만들었다. ‘맥심’이 나오자마자 고임금 남자 주방장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버스 안내양들처럼…. 마담이든 레지든 누구나 똑같은 맛의 커피를 물에 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방장과 함께 커피의 개성도 사라진 것이다.
제대 후 일본 커피회사 UCC에서 일하면서 본격적으로 커피에 입문한 서씨는 1991년 커피공장을 열어 커피를 볶기 시작했다. “어려운 길이었다. 그러나 조금 더 독특한 맛을 내려 하다보니 방법을 달리해야 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커피
교실을 통해 그동안 커피 애호가를 5000여 명 배출하며 좋은 커피의 저변을 넓히는 한편, 인도네시아 사향고양이 배설물에서 나오는 루왁 커피를 한국에 처음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헤이리에서 매일 서너 시간씩 커피를 볶는다. 볶는 노하우를 공개해도 괜찮은가 하고 물었다. “커피가 만들어지는 것을 보고 즐기라고 일부러 작업실처럼 만든 곳이다. 난 비밀이 없다. 얼마든지 봐도 좋다. 그러나 커피 볶을 때 집중해야 하니 질문은 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