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2016년 여름에 나온 졸저 『딸깍, 열어주다』(강)에 수록된 내용이다.
그는 철저한 현장주의 기자,
엄혹한 트레이너였다
‘안깡.’
지금까지 수많은 별명을 들어보았지만 이만큼 강렬하고 독창적인 것은 없었다. 간결하고 명료하고 발음도 똑 떨어진다. 별명의 주인을 떠올리면 순도 100퍼센트이다. 두 글자에 성격, 습성, 말투, 이력, 이미지 등 주인공의 모든 것이 집약되어 있다. 긍정적, 부정적 느낌도 적절하게 섞여 있으니, 그분을 아는 사람들은 한목소리로 그리 부른다. 그분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말이다. ‘별명의 전당’이 있다면 최고 자리에 놓일 작품이다.
얼마 전 내 또래 옛 동료가 그분 앞에서 “안깡께서~”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게 내놓고 부르는 모습을 보고 나는 놀랐다. 그것은 곧 우리 아버지 연배의 그분과 격의 없는 교류가 그만큼 많았다는 의미니까.
과거 안깡은 후배 기자들에게는 이를 ‘빠득’ 갈게 하는 독한 이미지였다. 안깡 밑에서 일했던 후배치고 눈물 한 번 빼지 않은 기자는 없을 것이다. 독설은 직설적이었다. 안깡은 독설을 통한 몰아대기를 상징하는 두 글자였다. 오죽하면 수십 년 지난 지금도 서슴없이 ‘안깡’이라고 부르겠는가.
안깡을 처음 만날 즈음, 나는 그분 때문에 너무 힘이 들어서 운도 참 없다고 생각했었다. 기자로서 자신감을 가지게 되면서 그런 생각은 차츰 옅어졌다. 그분이 우리 회사를 떠나고 난 뒤에는 기자생활을 그분 밑에서 시작하게 된 것이 행운이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기자로서 구실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순전히 그분한테서 받은 훈련 덕분이기 때문이다.
안깡의 『한국일보』 공채 12년 후배로서 원(源) 『시사저널』(『시사IN』이 지금의 『시사저널』에서 떨어져 나온 후 우리는 옛 『시사저널』을 이렇게 부른다)에서도 한솥밥을 먹은 적이 있는 소설가 김훈 선배는 그분이 회사를 떠날 때 환송사를 이렇게 썼다.
안병찬 선배는 (…) 철저한 현장주의 기자였고 엄혹한 트레이너였다. 우리는 그를 따랐고 두려워했으며 부러워했다.
그가 얼마나 엄혹한 트레이너였는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다음과 같은 것들에 신경을 쓰게 된다. ‘현장’ ‘사실확인’ ‘관찰’ ‘생생한 묘사’ ‘짧고 간결하고 바른 문장’ ‘부사, 형용사 쓰지 않기’.
원 『시사저널』 사람들은 ‘안 주간’이라는 명칭에도 익숙하다. 그분 앞에서는 안 주간, 돌아서면 안깡이라고 불렀다. 한 직장에서 편집주간(편집국장), 편집인, 주필, 발행인을 역임했으면 보통은 가장 높은 직함으로 불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분만은 첫번째 직함이 가장 잘 어울린다. 편집주간으로 지낸 5년 남짓한 기간에 기자들이 그분과 맺은 관계는 그만큼 강렬했다. 안 주간은 회고한다.
『시사저널』 편집국은 각처에서 모여든 젊은 기자들이 날 선 창을
꼬나 잡고 조랑말을 타고 달리는 몽골기병처럼 기동했다. 기자들의
개성은 서로 부딪혀 불꽃을 일으키고, 투혼이 한 솥에서 들끓었다.
(『관훈저널』 2014년 여름호 ‘안깡의 현장 이야기’)
정확하게 말하면, 대장 안깡이 기자들을 몽골기병처럼 만들어 바깥으로 내몰았다. 50대 중반 “중년기의 근력을 몽땅 쏟아부으며” 그렇게 했노라고 그분은 썼다. 안 주간 때문에 나는, 그분 표현을 빌자면 “조랑말을 다그닥다그닥 타느라” 땀보다 눈물을 더 많이 흘리며 기자 초년병 시절을 보냈다.
원 『시사저널』 창간 준비 기간부터 우리는 정신 못 차리게 바빴다. 새로운 시사주간지는 뉴스를 다루면서도 신문과 달리 심층 분석을 해야 했다. 선정성은 배제했으며 내용은 깊으면서도 날렵하고 정교해야 했다. 시각 요소로 표현하는 기사 또한 중요시했다. 한국의 『타임』지라 여기며 한국에서 처음으로 시도하는 것들이 많아 창간 초기의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각처에서 모여든 개성과 자존심 강한 기자들이 서로에게 적응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1989년 10월 29일자로 창간호가 나왔다. 대성공이었다. 그 무렵 안병찬 편집주간이 나타났다. 첫인상이 매서웠다. 박권상 주필이 점잖은 영국신사 같았다면 안 주간은 전형적인 야전사령관 스타일이었다. 저녁을 먹고 기자 몇 명이 앉아 잠시 쉬는 자리에서 안 주간이 대뜸 내게 물었다.
“성우제 씨는 지금 뭘 하고 있나?”
“기사 받아놓고, 미술부 레이아웃 기다리고 있습니다.”
취재부에서 기사가 넘어왔다고 해서 일이 진행되는 것은 아니었다. 미술부에서 사진 요소로 만드는 ‘레이아웃’을 넘겨줘야 거기에 원고를 넣고 기사를 편집할 수 있었다.
“제목을 미리 뽑아놓지그래?”
“글자 수가 정해지지 않아서 미리 뽑아도 소용이 없는데요.”
“그래도 만들어서 가져와 봐.”
안깡 본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밋밋하구먼. 다시 해봐.”
기사를 한 번 더 읽고 제목을 새로 만들었다. 대답은 마찬가지. 다시. 안깡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제목이 이렇게밖에 안 되나? 거, 거, 말이야, 좀더 재미있게 말이지, 눈길을 딱, 하고 낚아채는 거 말이지, 뭐, 그런 거 없어?”
그렇게 몇 번을 더 왔다 갔다 했다. 편집국에서 야근하던 사람들이 이 모습을 모두 지켜보았다. 안깡은 비단 나만 훈련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시사저널』은 창간 2개월 만에 정기 독자 수 5만을 돌파하며, 언론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혼란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안 주간은 편집국의 분위기를 다잡아나갔다. 방만한 시스템을 정비하고 일사불란한 체제를 갖추면서 몇 개월 만에 편집국을 휘어잡았다.
편집국의 질서가 잡히든 말든, 나는 한편에서 여전히 제목을 가지고 안 주간한테 호출당하며 ‘뺑뺑이’를 돌고 있었다. 그분은 그것을 한 주도 거르지 않았다. 그 지독한 부지런함 때문에 죽을 맛이었으나 그 덕에 나는 일을 빨리 배웠다. 6개월쯤 지나자 안 주간이 잡은 고삐가 다소 느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제작 마감은 금ㆍ토ㆍ월 사흘에 걸쳐 이루어졌다. 새벽 3시를 넘기기 일쑤였다. 안 주간은 인쇄소로 넘어가기 직전의 최종 교정지에서 의문이 생기면 새벽에도 해당 데스크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거, 자는데 깨워서 미안해요. 이거, 말이죠~” 하면서. 다음날 인쇄소에서 오는 교정쇄를 통해 고칠 수도 있었으나 안 주간은 그 몇 시간을 참지 못했다.
안 주간은 제작 담당자가 인쇄소로 출발하는 것을 보고 편집, 미술부 기자들과 함께 퇴근했다. 당시 목동에 살면서 그쪽 방향에 사는 기자들을 영등포까지 태워주곤 했다. 내려줄 때 하는 인사는 끔찍했다. “수고했다”가 아니었다. “내일 일찍 나와라.” 새벽 4시였다. 우리는 일찍 나가봐야 오전 10시였으나 안 주간은 매일 같이 아침 7시에 나와 8시 데스크 편집 회의를 주재했다.
혀 빼물고
개 뛰듯
뛰어라
안 주간은 취재 기자들이 ‘의자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는 꼴’을 보지 못했다. 엉덩이가 무겁다며 들들 볶아서 바깥으로 몰아내는 데 취미를 붙인 것 같았다. 그분은 ‘게으름은 전파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럴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무섭게 몰아붙였다. “혀 빼물고 개 뛰듯” 뛰어다니는 기자들은 두고두고 칭찬했다. 나는 그때 안 주간의 이 표현이 절묘하다고 생각했었다. 그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미국 프로농구 NBA의 마이클 조던이 코트에서 진짜로 혀를 빼물고 뛰어다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는 “혀 빼물고” 뛰어다니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절묘하다는 생각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당시 실용뉴스부에서 스포츠를 담당했던 강용석 선배가 마라톤을 완주한 적이 있다. 미처 훈련할 새도 없이 뛰었던 까닭에 기자는 다섯 시간 넘게 사투를 벌여야 했다. 강 선배는 극한의 고통을 비롯한 순간순간의 느낌을 기사로 생생하게 적었다. 안 주간은 투철한 기자 정신과 기사에 녹아든 현장감을 칭찬하며 몇 날 며칠을 이야기했다.
들볶이는 것은 취재 부서만이 아니었다. 안 주간은 내근 부서도 그냥 두고 보는 법이 없었다. 당시로써는 ‘우리를 괴롭히려고 날이면 날마다 연구하는 사람’ 같았다. 그분은 최종 마감 교정지를 단신까지 한 자도 빼지 않고 읽었다. 이미 마감이 끝나 인쇄소에 보낸 기사의 교정지를 뒤늦게 보고는, 고치라고 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제작부서 기자들 입에서 “아~” 하고 탄식이 흘러나왔다. “대세에 지장 없는 사소한 것이니 그냥 갑시다”라는 소리는 처음에는 하지 못했다.
50대 장년 체력이 강철 같았다. 제작부서는 주말과 월요일 마감 때 새벽까지 일을 하고 취재 부서가 바쁜 주 중에는 이틀 정도 쉬었다. 안 주간은 제작부서와 일을 하고도 주중에 쉬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우승한 독일 팀의 경기를 보면서 큰 소리로 되풀이해서 말했다.
“야, 야, 베켄바우어 감독 다리 좀 봐라. 얼마나 딴딴하냐. 저 다리로 경기 내내 서 있더라.” 그러면서 갑자기 매일 아침 열리는 데스크 편집회의를 서서 하자고 했다. 데스크들은 툴툴거렸다.
안 주간은 기자들을 몰아붙이는 데는 인정사정없었으나, 기사 내용에 대해서는 유연한 편이었다. 노태우 정권 때여서 군부독재의 기운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민중’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껄끄러운 시절이었다. 원 『시사저널』은 5·18 광주항쟁은 물론 비전향장기수, 한국전쟁 전후 양민학살, 제주 4·3사건 등 현대사의 민감한 소재를 자주 다루었다. 사노맹사건으로 검거된 박노해를 커버스토리로 쓰기도 했다. ‘뉴스 가치’가 있다면 안 주간에게 다루지 못할 소재는 없는 듯했다. 안 주간은 민감한 기사의 내용에도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개입해봐야 자극적인 단어를 골라내면서 ‘톤다운’하는 정도였다.
안 주간은 1970년대 말 홍콩에서 했던 경험을 직접 쓰기도 했다. ‘중공’과 경기하는 북한 여자 배구팀을 열심히 응원하다가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두들겨 맞고 강제 귀국한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다.
최근에 만나 “좌파도 아닌데 어찌 그러셨느냐”고 물었다. 안 주간은 “내가 왜 좌파가 아니야?”라고 웃으며 반문했다. 이어 그분은 한국전쟁 중에 북한으로 휩쓸려간 부친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려주었다. 자의에 의한 월북이 아니라 말 그대로 얼떨결에 휩쓸려 올라간 경우라고 했다.
부친은 일제강점기에 연희전문을 졸업한 엘리트였다. 안 주간은 경기중학교 1학년 때 부친과 그렇게 이별했다. 연좌제가 시퍼렇게 살아 있던 시절을 통과해온 그분은 이념 문제에서 아예 눈을 돌리거나 극보수 쪽으로 기울어질 법도 했다. 그러나 안 주간은 언론인으로서 그 분야에 꾸준히 관심을 보이는 쪽을 택했다.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의 무장 독립투쟁에 관해 원 『시사저널』만큼 많은 지면을 할애한 대중 매체는 없었다. 독립기념관 연구자가 관련 기사를 쓴 나를 찾아와 협조를 요청할 정도였다.
우리 잡지는 옌볜대학 박창욱 교수와 고려대 강만길 교수의 대담을 게재하기도 했다. 공산계열 독립운동사에 관한 내용이었다. 강만길 교수는 “진보적인 역사 잡지에서도 못하는 대담을 시사주간지에서 했으니 참 놀라운 일이다”라고 평가했다.
쉽게 쓰되
꽉꽉 눌러 담아라
안 주간은 편집국에서 가장 젊은 내가 내근부서에 앉아 있는 것을 늘 못마땅해했다. 눈에 거슬려 못 견뎌 하는 모습이 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내근부서라서 앉아 있는데도 “엉덩이가 무겁다”는 말을 자주 했다. 나는 부친상을 치르던 중에 부서 이동 통보를 받았다. 늘 빨리 움직이는 안 주간답게 문상을 가장 먼저 와서는 “당신, 문화부로 발령 냈어”라고 툭 던지듯 말했다. 입사 2년 만이었다.
문화부로 옮겨간 나는 바로 나가서 취재하고 기사를 써야 했다. 수습기자로 들어온 후배들처럼 따로 배우고 적응하는 기간이라는 것은 내게 없었다. 편집부 초창기 때에 이어 다시 한 번 현장에서의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크건 작건 기사만 쓰면 안 주간에게 불려갔다. 평소에는 안 주간 비서가 전화를 걸었다. “안 주간님이 오시래요.” 심기가 다소 불편하면 편집국 맨 안쪽의 국장석에 앉아서 “야, 성우제 씨” 하고 소리를 질렀다. 빨리 가지 않으면 엉덩이 무겁다고 더 혼났다. 매주 그렇게 불려다니니 괴롭기 짝이 없었다. 기자를 그만두거나, 견디거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안 주간은 말랑말랑한 예술 관련 기사라 해도 모든 것을 정확하게 확인하도록 했다. 어느 화가에 대한 기사를 쓰면서 ‘그룹전 10여 회 참가’라고 적은 적이 있다. 개인전도 아닌 그룹전 회수가 작은 기사에서 그리 중요할 까닭이 없었다. 안 주간은 “그거 셀 수 없는 거야? 확인해”라고 했다. 확인하면 해당 작가도 정확하게 세지 못했다.
‘안깡한테 불려가지 않을 날이 오기는 할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런데 6개월쯤 지날 무렵부터 불려가는 것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왜 나한테만 그래?’ 하고 불만스러워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개별적으로 훈련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분 표현대로 “얌전한 백면서생”이었던 나를 기자다운 기자로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안깡은 주문 사항이 많았다. 그중에서 입버릇처럼 강조한 것이 있다.
“꽉꽉 눌러 담아라.”
그것은 아무리 사소한 사실이라도 빗자루로 쓸 듯이 모아, 한 장면을 세밀하게 묘사하라는 요구였다. 여기에 “쉽게 쓰라”는 주문까지 추가되니, 취재를 많이 해도 머리가 아팠다. 어떤 선배들은 취재를 많이 하면 기사가 저절로 써진다고도 했으나 내게 그런 경우는 별로 없었다. ‘꽉꽉 눌러 담으면서도 쉽게 읽히는 기사’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되든 안 되든 그렇게 기사를 쓰도록 애를 써야 했다. 어렵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주간지 기자의 숙명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아무리 꽉꽉 눌러 담아도 취재한 내용의 30퍼센트 정도밖에 넣을 수 없었다.
안 주간이 가장 싫어한 스타일은 ‘휘휘 저어 만든 잡탕’이다. 현장 취재를 열심히 하지 않고 이런저런 자료들을 모아서 중언부언하며 쓴 기사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혐오감을 드러냈다. 세밀하고 생생한 묘사 없이 자료 위주로 쓰는 기사를 ‘세미나’라고 부르며 나쁜 기사의 전형으로 지목했다. 그러나 자료를 가지고 정밀한 분석 기사를 써야 할 경우가 많은 부서에서는 “발로만 뛴다고 무조건 좋은 기사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라며 반발하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안 주간은 늘 현장을 강조했다.
안 주간은 바로 그 현장의 묘사 또한 중요시했다. 나는 세미나 소리가 듣기 싫어서, 학술대회 같은 진짜 세미나 기사도 말이 되든 안 되든 첫 대목을 현장 묘사로 시작했다. 세미나 기사를 현장 스케치로 시작하니 색다른 맛이 있기는 했다.
안 주간은 ‘사실’을 세 번 네 번 확인하게 했다. 당시 우리 편집국 벽에는 액자가 몇 개 걸려 있었다.
“이름과 숫자는 틀려 있다.”
이름과 숫자로 몇 번 ‘사고’가 난 뒤 안 주간이 걸어놓은 액자였다. 편집국에 온 외부인들은 “저게 사시(社是)야? 이름과 숫자가 왜 틀려 있는데?” 하고 물었다.
확인을 하고 또 하다 보면 날짜, 시간, 장소, 연락처 등이 들어가는 작은 공연 정보 하나를 적으면서도 거의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 된다.
팩트를 쓸어 모아 정확하게 쓰기를 요구하면서도, 안 주간은 뜻밖에도 소설처럼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기사 스타일을 선호했다. 재미있게 쓴 기사가 있으면 한 주 내내 그 이야기를 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이야기하는 기사가 있을 정도이다. 문장 좋은 기자들은 당연히 환영받았다. 나는 안 주간이 좋아하는 스타일에 맞추려고 애를 썼다.
상투적인 표현은 바로 고쳐버렸다. 대표적인 것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와 ‘~것’으로 끝나는 문장이다. 화려한 수사는 물론 웬만한 형용사는 가차없이 제거했다. 문화예술 기사도 건조하게 써야 했다.
사이공 함락
일곱 시간 전에 탈출한
‘기자의 전설’
1975년 4월30일 천신만고 끝에 사이공을 탈출한 후 남중국해 피난선 밀러 호 상갑판에서 기사를 작성중인 안병찬 한국일보 특파원. 1975년 5월2일 낮.
안 주간은 『한국일보』 『중앙일보』의 시경캡으로서 명성을 드날린 사회부 기자 출신이었다. 한밤중에 병원 시체실에 들어가 시신 얼굴을 확인해 기사를 쓰고 결국 사건을 해결했다는, 사건 기자로는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봉이었다.
특히 ‘안병찬’이라는 이름을 한국 언론계에 아로새긴 것은 『한국일보』 특파원으로서 월남 패망의 날 새벽, 사이공이 함락되기 일곱 시간 전에 탈출했다는 사실이다. 안깡은 다른 특파원들이 모두 철수한 뒤에도 가능한 한 끝까지 홀로 남아서 사이공 최후의 현장을 지켜보았다.
사이공이 함락되는 날 월맹군이 행군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나도 겁이 많이 나서 벌벌 떨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역사적인 광경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어서 현장을 뜰 수가 없었다.
사이공 최후의 날인 1975년 4월30일 새벽 4시 10분 안깡은 미 해병대의 치누크 헬리콥터에 뛰어들어 피난민들과 함께 패망한 사이공을 공중 탈출했다. 마지막 헬리콥터였다. 그후 남중국해의 미국 7함대 파난선 서전트 밀러 호, 필리핀 수비크 만의 미군기지, 미국 괌 섬의 타무닝 난민수용소를 거쳤다. 그 닷새 동안 안병찬 기자의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그가 실종되었다는 뉴스가 『한국일보』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피난선을 타고 나와 난민수용소를 거쳐 귀국했던 그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내가 쓰는 것 하나하나가 세계적인 특종이었다”고 안 주간은 말했다. 전 세계 모든 기자가 쓰기를 꿈꾸었으나 어떤 기자도 쓰지 못한 기사를 썼기 때문이다.
이런 이력을 감안한다면, 시사주간지에서 안 주간은 사회나 정치, 경제 등 시사 현안에 주안점을 둘 법했다. 그러나 그것은 선입견이었다. 그분은 문화예술 지면에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림이 된다’ 싶으면 사진으로만 지면을 꾸미는 일이 자주 있었다.
서울이 아닌 광주에서 주로 활동해온 수채화가 강연균 씨가 서울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열었을 때 내가 기사를 썼었다. 안 주간은 도록을 살펴보더니 4쪽을 쓰라고 했다. 원래는 1쪽짜리 기사였다. 비좁은 시사주간지 지면에서 한 작가에게 4쪽을 내주는 것은 파격이었다. 그 가운데 1쪽은 강연균 화백의 그림으로만 채웠다.
1993년 12월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으로 매스컴이 떠들썩한 적이 있다. 속보를 보고 안 주간은 당시 김훈 사회부장과 조천용 사진국장을 발굴 현장에 보냈다. 문화부 기자들은 기사 마감을 앞두고 있어서 그것을 맡을 여력이 없었다. 안 주간은 그 주에 나온 잡지 첫머리를 향로 기사로 채웠다. 10쪽이 훨씬 넘었다. 물론 조 국장이 찍어온 다양한 사진들로 꾸민 지면이었다.
향로에 모든 매체가 관심을 보였으나 『시사저널』만큼 자세하게 다룬 곳도, 향로의 다양한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준 곳도 없었다. 안 주간은 향로의 가치를 바로 알아보고 뉴스를 키우고 사진을 확보했다. 이쯤 되면 뉴스에 대한 동물적인 감각이라 할 만했다. 이후 문화재 당국이 사진 촬영을 차단하는 바람에, 다양한 각도에서 찍은 좋은 향로 사진을 구하러 우리 회사 자료실로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사진 이미지를 중심으로 파격적인 지면 구성을 자주 하는 안 주간 덕분에 내 고민을 해결한 적도 있다. 1993년 김기창 화백이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운보 팔순 기념 대회고전’을 연 적이 있다. 관람객 10만 명이 몰릴 정도였으니 그 전시 내용은 일간지와 방송에 나올 만큼 나온 터였다. 나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도 없었지만, 딱히 더 쓸 이야기도 없었다. 기사를 쓰면 ‘뒷북치기’가 될 것이 뻔해서 고민 중이었다. 안 주간이 “이 전시 기사 쓸 거지?” 하면서 사진 기자와 함께 전시를 보러 가자고 했다.
가는 길에 나는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도착하자마자 안 주간은 “운보 영감 어디 계시나? 빨리 찾아와”라고 했다. 봉걸레로 그린 ‘一’자 그림(「점과 선」 1989)이 전시장 1층 벽면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안 주간은 그 그림옆에 지팡이를 든 운보를 세우고 사진 기자에게 찍으라고 했다. 근사한 구도였다. 이 사진은 『시사저널』의 맨 앞 ‘초점’ 지면 2쪽에 걸쳐 게재되었다. 나는 사진 설명처럼 짧은 기사를 썼으나, 어느 매체보다 좋은 지면이었다고 자부했다. 2001년 운보가 타계했을 당시 편집국장이었던 김상익 선배가 내게 추모 기사를 쓰라고 했다. 8년이나 지났는데도 김 선배는 운보의 그 사진을 기억했다. 사진은 그것을 쓰라고 지시했다.
훨씬 나중의 일이지만 이런 일과 관련해 안 주간이 내 마음을 알아줘서 고마워했던 적이 있었다. 1997년 사진부 백승기 선배 와 22일 동안 고대 이집트 유적을 보러 갔었다. 최북단 알렉산드리아 및 삼각주에서부터 최남단 아부심벨까지 나일강을 따라서 내려간 대형 기획이었다. 한국 기자들이 그곳을 그렇게 돌아다닌 것은 처음이었다. 우리는 창간 8주년 기념 커버스토리로 15쪽 을 받았으나, 필름 300통이 넘는 사진을 보여주기에는 지면이 턱없이 부족했다. 지면을 더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기사가 나온 뒤 안 주간이 회사에 들러 나에게 말했다. 당시 안 주간은 경원대 신방과 교수로 가 있었다.
“야, 그거 참 아깝다. 사진 좋은 거 많을 텐데 한 호 전체를 이집트 특집으로 다 해치우지 그랬니. 다른 기자들도 이참에 숨 좀 돌릴 겸해서……”
백면서생을 기자로 만든
‘김산의 아리랑’
프로젝트
나는 편집부에서도, 문화부에서도 기자생활 초창기에 안 주간 때문에 노심초사했으나 반항하지 않고 따라 하려고 노력했다. 끊임없이 몰아대는 바람에 속이 뒤집히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 많았다. 고생스럽게 출장 다녀와서 밤잠 안 자고 기사를 썼는데 “유람 다녀왔구나?”라고 하면 많이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그분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면 내 기사가 달라지는 것을 알고 있으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 참지 않는다고 내가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러던 중에 그분을 내 기자 생활의 스승으로 생각하게 한 계기가 있었다. 님 웨일스의 『아리랑』 주인공 김산에 대해 취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내 생애 첫번째 해외 출장이었다. 그 아이템이 1993년 추석 합병호 커버스토리로 갑자기 결정되는 바람에,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안 주간은 1977년 홍콩 연수 중에 님 웨일스의 『아리랑』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노라고 했다. 미국 저널리스트 님 웨일스가 중국에서 조선인 공산주의 혁명가를 인터뷰해 책을 썼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시절이었으니, 그 사실을 처음 접한 기자가 호기심을 갖는 것은 당연했다. 그것을 계기로, 대장정을 마친 중국 공산당을 중국 옌안에서 취재하고 서방 세계에 최초로 알린 에드가 스노와 님 웨일스의 활동에 대해 안 주간은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리랑』이 번역, 출간되어 대학가에서 널리 읽힐 무렵 나도 남들처럼 그 책을 읽었었다. 그때만 해도 중국 공산주의 혁명 같은 데 별 관심이 없어서 그런지 나로서는 특별한 감흥이 없었다. 안 주간은 김산의 행적을 님 웨일스가 아닌 우리 시각으로 찾아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분은 나더러 베이징과 옌볜 등에 가서 김산의 흔적을 찾으라고 했다. 『아리랑』에 나오지 않은 김산의 행적을 발굴해 오라는 내용이었다.
1984년 중국 정부가 김산을 특무(간첩)로 오인해 처형한 과오를 인정하고 김산을 복권한 터여서, 중국 조선족 사회에서는 김산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옌안파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김산 같은 혁명가들을 외면했던 북한도 그들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안 주간은 중국에서 내가 구입해 간 김일성 주석의 자서전 『세기와 더불어』에서 김산의 이름을 직접 찾아냈다.).
최근 만난 자리에서 안 주간은 말했다.
“그때 내가 말이야, 얌전한 당신을 훈련시키려고 딱, 하고 충격 요법으로 특파한 거야.”
충격은 출발도 하기 전부터 왔었다. 내가 중국 비자를 알아보던 중에 편집국에서 안 주간과 마주쳤다.
“당신 말이야, 출장 명령 내린 지가 언젠데 아직도 꾸물거려? 지금 여기서 뭣 하는 거야?” “비자를 ‘급행’으로 해도 5일이 걸려서……”
“여기서 시간 다 까먹을래? 비자는 현지에 가서 돈 주고 사면 될 거 아냐?”
불호령이었다. 나는 거의 혼비백산하다시피 했다. 안 주간은 과거 방콕에서 월남에 들어가는 비자를 500달러를 주고 샀었다고 했다.
비자를 사든 구걸하든 나는 중국에 빨리 들어가야 했다. 무작정 톈진행 비행기를 탔다. 항공사는 중국 비자가 없는 내가 항공기에 탑승하는 것을 거부했다. 내가 사정을 설명하자 ‘톈진에서 비자를 받지 못해 중국에 입국하지 못하고 한국으로 되돌아와도 항공사는 책임지지 않는다’라는 문서에 사인하게 한 후 탑승을 허락했다.
취재부에서 일한 경력이 일천한 신참 기자에게, 1년에 두 번밖에 내지 않는 합병호의 커버스토리를 맡긴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더군다나 동행하는 사진 기자도 없이, 해외취재 경험이 전무한 기자를 혼자 내보내는 출장이어서 안 주간으로서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당시를 돌아보면, 비행기를 탈 때부터 무모하기 짝이 없는 출장이었다. 중국 비자를 받지 못한 것은 물론 톈진에서 베이징-창춘-옌볜에 이르는 차편이나 숙소 또한 하나도 결정하지 못한 채 떠난 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행운이 따르기 시작했다. 톈진 공항에 내려 비자를 요청했더니 바로 나왔다. 당시 중국을 상대로 무역을 하던 모 인사가 “톈진에 연락해 두겠다”고 했었는데, 그 부탁이 통했던 모양이다. 그 사람이 시킨 대로 100달러를 주려고 준비했으나 중국 이민국 담당자는 그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베이징에서 유학 중인 대학후배를 만난 것은 더 큰 행운이었다. 서울에서 급히 연락했더니 마침 후배 부인이 나와 같은 비행기를 탄다고 했다. 후배는 톈진공항에 마중을 나왔고, 베이징을 거쳐 창춘과 옌볜까지 가는 모든 항공과 기차 편을 알아봐주었다. 베이징에 있는 김산 연구자를 수배해 약속을 잡았고 베이징사범대학 기숙사에서 나를 재워주었다(그 후배는 서강대 이욱연 교수이다).
복잡한 베이징공항에서는 게이트가 바뀌는 바람에 한참 동안 헤매던 중에 우연히 아는 분을 만났다. 내 아버지 친구분이었다. 중국 시찰단으로 온 그분은 마침 창춘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나와 같은 비행기였다. 나는 시찰단 뒤에 붙어서 가이드를 따라갔다.
나는 기차를 타고 가면서 색다른 경험을 했다. 창춘에서 옌볜까지 가는 기차표가 매진된 상황에서 미화 10달러를 따로 썼더니 신기하게도 표가 구해졌다. 창춘에서 여행사를 하는 조선족 젊은 엘리트들을 만난 덕분이었다.
행운은 옌볜에서도 계속되었다. 마침 소설가 최명희 씨가 옌볜에 몇 달째 머물고 있었다. 당시 장편 『혼불』을 집필 중이던 최명희 선생은 자료를 모으려고 그곳에 와 있었다. 문화부 데스크인 김현숙 선배가 그 정보를 입수해 연락을 해두었다. 최 선생은 옌볜 역으로 새벽에 마중을 나왔고, 김산 연구자들을 수소문해 두었다.
나는 김산의 행적을 추적하고 연구하는 교수, 작가, 기자, 방송사 PD 등을 만나 인터뷰하고 자료를 모았다. 김산에 대한 조선족 학자들의 연구 성과는 예상보다 훨씬 컸다. 중국혁명과 항일투쟁을 동시에 수행한 조선 출신 혁명가들을 되살리려고 그들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중국 땅에서 자기들의 위상을 높이고 정체성을 확고하게 하는 유력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님 웨일스를 만난 덕분에 더욱 유명해진 김산(중국 동포들은 님 웨일스의 『아리랑』을 『백의동포의 영상』이라는 제목의 우리말로 번역했다)뿐 아니라,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정율성, 한위건 같은 인물들의 자료를 많이 챙겼다. 그들은 김산 못지않게 위대한 항일 독립투사들이었으나, 중국 공산당에 소속되어 활동했다는 이유로 남한에서나 북한에서나 모두 외면받았다. 『중국인민해방군가』를 만든 유명 작곡가 정율성 이외에는 중국에서도 제대로 조명된 인물이 없었다. 그런 혁명가들을 조선족 동포들이 되살리려고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산이 감옥 생활 중에 중국어로 쓴 시 한 편을 찾아들고 들어가자, 안 주간은 ‘최초 발굴’이라며 좋아했다. 저녁에 회사에 도착한 나는 다음날 아침 10시까지 기사를 마감해야 했다. 밤새워 기사를 썼다.
평소에는 기사의 초고를 두 번 이상 고치고 데스크를 거쳐 편집부에 넘겼다. 오전 6시께 초고를 완성해 출력키를 눌렀다. 원고를 가지러 프린터가 있는 곳으로 갔더니, 누가 출력되어 나오는 종이를 한 장 한 장 집어 들면서 훑어보고 있었다. 안 주간이었다. 그날따라 1시간 일찍 나온 안 주간은 원고의 마지막 장이 나오자, 내게 주지 않고 그냥 들고 가 버렸다. 성격이 급한 안 주간은 내가 기사를 한 번 고칠 기회도 주지 않았다.
기사를 빨리 보고 싶어 하는 안 주간의 마음을 나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랜 세월 묵혀온 아이템이었기 때문이다. 안 주간 스스로도 김산의 『아리랑』 커버스토리에 직접 참여했다. 1946년 『신천지』라는 잡지가 『아리랑』을 번역, 연재한 사실을 새롭게 밝혀낸 분이 안 주간이었다. 안 주간은 우리 자료실 담당자로 하여금 국회도서관을 뒤지게 했다.
나는 안 주간이 떠미는 대로 2주 동안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바로 그 첫번째 해외 출장을 통해 나는 기자로서 부쩍 성장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취재하고 기사를 쓰면서 자신감이 붙었다. 그와 동시에 안 주간의 ‘잔소리’도 잦아들더니 어느 때부터 거의 들리지 않았다.
협박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배우다
수십 년 기자생활을 하면서 온갖 경험을 다 해 본 안 주간 덕분에 곤경에서 빠져나온 적도 있었다. 1990년대 초반 북한 미술품이 중국을 통해 한국으로 물밀 듯이 들어왔다. 일명 ‘나까마’라 불리는 거래상들이 “평양의 박물관에서 떼어왔다”며 북한의 미술품들을 유통시켰다. 진품으로 거래되는 작품들이 대부분 복제품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취재를 시작했다. 문제는 예상보다 훨씬 심각했다.
유명 월북 화가의 작품을 구입했다는 ㄱ씨를 찾아 연락했더니 선뜻 취재에 응했다. 해당 작품에 대한 기사를 쓰면 작품이 더 유명해질 것이라고 그는 기대했던 모양이다. 그이가 고가에 구입했다는 작품의 사진을 찍었다. 똑같은 작품이 북한에서 간행된 잡지에 실려 있다는 이야기를 다른 곳에서 들었다. 광화문에 있는 통일원 자료실에 가서 잡지를 찾아내어 그 작품의 도판 사진을 찍었다(안 주간이라면 “광화문 무슨 빌딩 몇 층이야? 잡지 제목은 뭐고, 언제 나온 거고, 월간이야, 뭐야?”라고 반드시 다그칠 것이다).
나는 그 내용을 특집 기사로 썼다. 월북화가 모씨의 대표작 한 점이 서울에 와 있다, 그러나 진위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는 사진설명을 달고 도판 2장을 나란히 실었다. 기사가 나가자 ㄱ씨가 급히 연락을 해왔다. 도판들을 비교해보니 두 작품이 달랐다고 했다. 나도 몰랐던 내용이었다. 결과적으로 ㄱ씨가 가진 작품이 복제품으로 판명된 셈이다. 그는 노발대발했다. 그는 “네가 진짜를 가짜로 만들었으니 책임을 지라”며 며칠 동안 협박 전화를 했다. 협박은 점점 거칠어졌다. “작품을 네가 사라.” “언제 깔릴지 모르니 차 조심하며 다녀라.” “네 아이가 어느 학교 다니는지 알고 있다.”
데스크였던 김현숙 선배에게 보고했다. 안 주간한테 가서 상의하자고 했다. 안 주간은 사진 국장을 불러 잠깐 이야기하더니 내게 지시를 내렸다.
“사진부 이상철 기자하고 지금 나가. 그 사람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사진부터 여러 장 찍어. 그리고 밥이나 먹으면서 이야기하자고 해. 식당가서 밥 먹고 바로 일어서서 나와. 밥값은 당신이 반드시 내야 해, 알았어?”
나는 그대로 따랐다. 덩치가 큰 이상철 선배가 플래시를 터뜨리며 카메라 셔터를 연속으로 누르자 그이는 움찔했다. 우리는 냉면집으로 갔다. 그 후 연락이 없었다.
안 주간이 경원대 교수로 옮겨간 후로도 그분의 영향력은 나에게 지속되었다. 나는 안 주간에게 훈련받은 대로 나 자신을 닦달했다. 2000년 2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새로운 밀레니엄을 기념해 열린 ‘백남준의 세계’전을 취재하러 간 적이 있다.
신작 「야곱의 사다리」가 나와 있었다. 바닥에서 쏜 레이저가 천장까지 올라갔고, 천장에서는 물이 떨어졌다. 땅의 기도가 하늘에 닿으면 하늘에서는 물을 떨어뜨려 응답한다는 내용이었다. 물줄기는 하늘에서 내려주는 빗줄기 같았다. 나는 물줄기의 숫자가 문득 궁금했다. 물이 떨어지는 가장 가까운 곳까지 올라가서 물줄기를 하나하나 세었다. 물줄기를 뚫고 위로 올라가는 레이저가 반사판을 통해 몇 번이나 꺾이는지, 레이저 반사판은 몇 개인가도 파악했다. 의미가 있든 없든 숫자를 그렇게 확인하는 방식이 몸에 배어버린 것이다. 안 주간이라면 “물줄기가 몇 개야?”라고 물어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안 주간은 사이공이 함락되는 그 긴박한 순간에도 한국 대사관이 마지막 무선전신을 보내고 부수어버린 단파, 중파 송수신기의 기종과 번호까지 적어서 기사에 썼던 기자였다.
안 주간은 회사를 떠난 뒤에도 원 『시사저널』의 생명이 끝나는 날까지 모든 기사를 읽었다고 했다. 우리 회사 기자들의 성향을 안 주간만큼 속속들이 파악하는 선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도 혹독하고 엄한 트레이너였으나 안 주간은 우리에게 인간적인 모습을 자주 드러냈었다. 편집국에서는 눈물 쏙 빠지게 야단을 치다가도 바깥 술자리에서는 언제나 유쾌하게 놀았다. 술은 한 모금도 못 하면서도 술 먹은 사람보다 더 재미있었다.
편집국에서 야근하다가도 가끔씩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냈다. 미술부 기자가 저녁 시간을 놓쳐서 한밤중에 컵라면에 물을 부었다. 면이 다 익을 무렵 안 주간이 오더니 “여, 그거 맛있겠다” 하며 날름 들고 가버렸다.
한솥밥을 먹을 때는 그렇게들 지겨워하고 무서워하기도 했던 안깡이지만 후배들은 지금도 그분을 자주 찾는다. 2015년 여름 서울에 가면서 안 주간께 연락을 드렸다. 안 주간은 2002년 내가 캐나다로 살러 가기 직전에 나를 불러 밥을 사주고 당신의 명함 뒷면에 메모를 적어 주었다. 토론토에 후배가 살고 있으니, 찾아가서 전하라고 했다. 메모 내용은 “이 후배가 외롭지 않도록 해달라”였다. 나는 안 주간의 그 마음을 늘 잊지 않고 살아왔다.
안 주간은 서울에서의 만남을 ‘성우제 포럼(노래의 밤)’이라 이름 짓고 ‘동우’라고 부르는 옛 후배들을 긴급 소집했다. 갑자기 불렀는데도 안 주간과 함께 10여 년 동고동락한 내 동료 기자 8명이 모였다. 모두 50대였다. 우리가 안 주간을 처음 만났을 때의 바로 그 나이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예전처럼 밥 먹고 술 먹고 노래하면서 놀았다.
안 주간은 여전했다. 그분은 자랑했다. “내가 말이야, 요즘 5킬로그램을 딱, 하고 뺐거든?”
“어떻게요?”
“굶었어.”
노래의 밤이 끝난 후 좀더 계시라고 말씀드렸다. 진심이었다. 그러나 그분은 “당신들끼리 재미나게 놀아” 하며 한마디로 거절한 뒤 딱, 하고 돌아섰다. 안깡다웠다.
안병찬
1962년 「한국일보」 견습기자 13기로 기자 생활을 시작해, 「한국일보」· 「중앙일보」 사회부 기자 및 시경캡을 거쳐, 「한국일보」 사이공 특파원, 파리 특파원을 역임했다. 1989년 10월에 창간한 『시사저널』을 진두지휘하며 한국에 시사주간지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경원대 신방과 교수와 대학원장을 지냈으며, 지금은 연구와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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