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고교에 입학하자마자 우리는 음악시간에 교가와 응원가를 배웠다. "얼싸~ 좋구나 빅토리 빅토리"로 시작되는 <제1응원가>를 가르치던 음악 선생님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 이 노래 작곡자는 윤이상이라는 분인데, 지금 서독에서 세계적인 작곡가로 활동중이시다. 그 분이 작곡한 오페라 <춘향>은 수십분에 걸쳐 기립 박수를 받았다. 밖에 나가서는, 학교에서 이 이야기 들었다고 절대 말하지 마라."
나는 음악 선생님의 마지막 당부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저 이야기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지나고 보니 유신의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1979년 봄, 철없는 고교 1년생들에게 윤이상씨 이야기를 해준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안기부에 끌려가 물고를 당하고 교단에서 쫓겨나고도 남을 행위였다.
그렇다고, 그 유명한 작곡가가 만든 노래를 제자들에게 가르치면서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 것도 퍽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당시 바깥에 나가 저 이야기를 한 제자들이 없어서 우리가 졸업할 때까지 그 선생님은 '무사'했다.
나는 윤이상이라는 이름을 고교 음악 시간에 처음 들었다. 훗날 기자가 되고 난 후에 보니, 문화예술 기사에서 윤이상은 언제나 뜨거운 감자이자 반드시 풀어내야 할 화두였다.
1994년 우리 회사에서 <윤이상 페스티벌>을 기획했다. 기획의 핵심은 두 가지. 첫째는, 국내 음악인들이 윤이상의 음악을 일주일에 걸쳐 집중, 조명하는 것. 두번째는, 윤이상씨의 귀국이었다.
작곡가 윤이상(1917~1995)
한국 음악계는 들썩였다. 윤선생 앞에서 연주를 한다는 사실에, 그해 여름 그 뜨거운 삼복더위에 아랑곳 않고 최고의 연주자들이 모여 연습에 몰두했다. 오케스트라와 오페라를 준비하는 한편으로, 윤이상씨 귀국 절차는 조용하지만 정교하게 진행되었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윤이상씨의 귀국에 반대를 하지 않았다.
선배 기자 두 사람이 유럽에 특파되어 윤이상씨를 직접 인터뷰하는 사이에, 나는 국내 음악인들의 준비 과정을 취재했다. 음악가들은 정치색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것은 음악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문제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윤이상 페스티벌에 연주자로 참여하는 것은 큰 영광"이라고 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한국 최고의 연주자들이었다. 그들은 생존한 현대 음악의 거장을 모국에서 맞이하는 무대에 오른다는 사실 하나만 생각했다. 정치니, 분단이니 하는 것과는 아랑곳없이, 다름아닌 '모국에서 저주받은 전설'을 맞이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전율하다시피며 연습에만 줄창 몰두했다.
작고한 김용윤 예음문화재단 이사의 활약은 눈부셨다. 윤이상 선생의 귀향은, 청와대와 의견을 조율해 가며 물흐르듯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귀국 날짜가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시점에 돌연 대형 사건이 터졌다. 그 일로 인하여 윤선생의 귀국은 하루아침에 취소되었다. 음악인들은 눈물을 뿌렸다. 그들은 주인공 없는 페스티벌을 말없이 진행했다. 그것은 뭐라 말로 표현을 할 수 없는 절망이었다.
노 작곡가 윤이상씨의 귀향을 가로막은 것은, 느닷없이 나온 보수 신문들의 사설이었다. 2개 신문이 사설을 썼는데, 그 가운데 하나의 제목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윤이상씨의 경우.'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윤이상씨는 빨갱이". 이 사설들로 인해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었다. 윤 선생은 그 이듬해 독일에서 작고했다. 1967년 빨갱이로 '몰려' 고국에 끌려와 옥고를 치르다가 서방 예술가와 정치가들의 구명 운동으로 독일로 간신히 빠져나간 후, 단 한 번도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2000년 2월 윤이상씨의 고향인 경남 통영에서 현대음악제가 처음으로 열렸다. 그 음악제는 통영 출신인 윤이상씨를 추모하고 그의 음악적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평생 고향의 쪽빛 바다를 그리워하던 선생은, 이렇게 음악으로 귀향했다. 그리고 현대음악제를 기점으로 윤이상 선생에 덧씌워진 모든 것이 풀린 듯했다(아래 상자에 당시 기사가 있다).
백남준과 윤이상 : 20대 때 다름슈타트음악제에서 만나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백남준이 세계 미술계의 산봉우리라면 윤이상은 세계 음악계의 거대한 산맥이다.
그러다가 며칠 전 내 친구 김훤주가 블로그에 올린 글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http://2kim.idomin.com/1016
글의 요지는, 윤이상국제음악당 건립이 추진되었으나 이름이 통영국제음악당으로 바뀌고, 나오기로 했던 국가와 도 예산이 모두 취소되었다는 것.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은 과거 야만의 시대로 돌아가지 못해 안달을 하는 듯이 보였다. 동백림 사건은 유럽에서 유학하던 한국의 젊은 엘리트들을 붙잡아와서 간첩 사건으로 조작한 것이라는 사실이 명명백백 드러났다. 국가가 인정한 사실이다. 윤이상 선생 또한 '빨갱이'가 아니라고, 명예회복이 이루어진 것이 언제인데…. 지금도 빨갱이 타령을 한다는 것은 시대착오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요즘 전 세계 도시들은, 없는 작은 사실도 크게 포장하여 세계에 널리 알리고 사람들을 불러모은다. 브랜드를 찾지 못해 속된 말로 혈안이다. 윤이상이라는 이름은 세계적으로 통하는 한국의 몇 안되는 명품 중의 명품 브랜드이다. 시대착오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있는 사실도 축소하고, 굴러온 복도 냅다 걷어차는 무지와 야만. 화가 난다기보다는 슬프다. 백번 천번 양보하여 그가 좌익이었다 하더라도 그는 작고했고 음악만 남았다. 최소한 음악에는 '붉은 기운'이 없다.
윤이상 음악에 붉은 기운이 서려 있어 그를 반대한다면, 윤이상 작곡의 고려대학교 교가는 빨갱이 노래이다. 현 대통령도 '반역자' 윤이상씨가 작곡한 그 붉은 노래를 부르며 공부했을테고, 그 붉은 노래는 지금도 불리고 있다. 내가 졸업한 고교에서도 응원가는 신나게 불릴 것이다. "닐니리 좋구나 빅토리 빅토리" 하면서….
[음악] 윤이상 추모 <통영현대음악제> | ||||
<통영현대음악제> 성황… 현대 음악 산실 가능성 보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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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통영에서 자랐고, 통영에서 그 귀중한, 정신적인, 정서적인 모든 요소를 내 몸에 지니고, 그것을 나의 정신과 예술적 기량에 표현해서 나의 평생 작품을 써 왔습니다. 내가 구라파에 체재하던 38년 동안 나는 한번도 통영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 잔잔한 바다, 그 푸른 물색, 가끔 파도가 칠 때도 파도 소리가 나에겐 음악으로 들렸고, 그 잔잔한, 풀을 스쳐가는, 초목을 스쳐가는 바람도 내겐 음악으로 들렸습니다.” 왼쪽의 사진은 1994년 파리에서 찍은 생전의 모습이다. 저 때만 해도 윤 선생은 25년 만의 귀향에 퍽 행복해 했다. 저 사진을 찍은 며칠 후, 보수 신문들의 사설 2개로 현대음악의 거장은 귀향을 포기해야 했다. 그 이듬해 베를린에서 작고했다. 현대 음악의 거장 윤이상씨(1917~1995)가 타계하기 1년 전 조국 방문이 좌절되자 고향의 시민에게 보낸 음성 메시지이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나 정작 그를 낳은 조국 땅을 끝내 밟지 못한 음악가, 꿈에라도 볼까 싶어 침대 머리맡에 고향 사진 5장을 언제나 붙여 놓았던 윤이상씨가 작품으로나마 고향에 돌아왔다. 고향 사람들은 그의 음악이 울려 퍼지는 음악회장을 가득 메워 40여년 만에 귀환한 예술가를 따뜻하게 맞이했다. 지난 2월18일 오후 7시30분 <통영현대음악제-윤이상을 기리며>가 막을 연 시민문화회관 공연장은 무대부터 인상적이었다. 무대 중앙에 대형 사진으로 등장한 윤이상씨는 창원시립교향악단과 객석을 지켜보았다. <오케스트라를 위한 전설-신라> <교향곡 제2번>을 국내에서 초연한 창원시향은 정성을 다해 연주했고, 객석의 청중은 숨소리를 죽여 가며 귀를 기울였다. '윤이상을 기리는’ 음악제는 다음날 독주곡 작품 및 헌정 작품 연주회, 세미나·강연·워크숍 들로 이어졌고, 20일 세계에서 처음 연주하는 작품으로 막을 내렸다. <통영 시민의 노래>는 1956년 유럽으로 건너간 윤이상씨가 1966년 유치환 시인이 쓴 가사에 곡을 붙여 만든 노래이다. 1967년 동베를린 사건 여파로 사라질 뻔한 악보가 얼마 전에 발견되어 통영에서 처음으로 불린 것이다. 이 악보에는 ‘유치환 노래 윤이상 가락, 1966년 8월9일 미국 콜로라도 주 아스펜 음악제(로키 산맥의 산중)에서 지음’이라는 글씨가 작곡자의 친필로 선명하게 적혀 있다. 사흘 동안 열린 <통영현대음악제>는 분단의 희생자를 명실상부하게 복권시키는 마당이자, 통영시를 음악 도시로 만들겠다고 선언하는 잔치였다. 위대한 음악가를 배출한 도시는 거의 예외 없이 국제적인 음악 도시로 발돋움했다. 모차르트의 도시 잘츠부르크가 그렇고, 빈과 바르샤바는 베토벤과 쇼팽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올해 출범한 <통영현대음악제>는 세계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윤이상이 자란 곳’이라는 자산을 바탕으로 통영시를 세계적인 음악 명소로 거듭나게 하겠다는 청사진을 가지고 출범한 축전이다. “아버지는 한평생 고향을 그리워하셨다. 직접 와서 보고 아버지의 깊은 그리움을 비로소 이해했다. 아버지의 고향 바다가 이렇게 아름다운 줄은 몰랐다.” 이번 음악제에 참석하려고 미국에서 건너온 윤이상씨의 딸 윤 정씨는 ‘아버지는 늘 눈을 감은 채 고향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고 말했다. <통영현대음악제>를 주관하는 국제윤이상협회 한국사무국은 윤이상의 음악과 통영의 아름다운 풍광을 결합해 국제적인 축전으로 키워 가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밝혔다. 쪽빛 바다와 아름다운 섬으로 절경을 자랑하는 한려수도의 중심 도시인 통영은, 관광으로도 국제 경쟁력을 갖추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청사진은 이미 나와 있다. 통영시가 지난해 9월 한국관광연구원에 의뢰한 ‘통영시 21세기 관광 진흥 종합 계획 수립 학술 연구 용역’에 따르면, ‘윤이상 선생 관련 계획안’은 세 가지로 나뉜다. 올해 처음 열린 <통영현대음악제>를 해마다 조금씩 키워 나가고, 윤이상기념관을 건립하며, 윤이상음악공원을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통영 바다와 윤이상 음악의 환상적 결합 <통영현대음악제>의 모델은 80년 전통을 지닌 독일의 <도나우싱겐 음악제>. 인구 4만명의 작은 도시 도나우싱겐은 해마다 현대 음악 축전을 열어 세계 무대에 데뷔하려는 현대 작곡가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등용문 구실을 하고 있다. 윤이상씨도 1966년 도나우싱겐에서 <예악>을 초연함으로써 세계 음악계에 등록했다. 통영 연구를 담당한 한국관광연구원 허갑중 연구위원은 “출범할 당시 도나우싱겐과 비교하면, 지금 통영의 여건이 훨씬 좋다. 20년만 지나도 <통영현대음악제>는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통영이 지닌 여건이란, 아름다운 풍광과 작곡가의 세계적인 명성, 통영오광대·승전무·남해안별신굿 같은 무형문화재, 윤이상뿐 아니라 김상옥·유치환·김춘수(이상 시인) 박경리(소설가) 전혁림(화가) 등을 낳았다는 예술 도시로서의 자부심이다. 무엇보다 통영에는 윤이상씨의 체취가 그대로 살아 있다. 일본에서 유학한 그가 음악가로서 첫발을 내디딘 곳이 그의 고향이다. 그는 1937년 화양학원(지금의 화양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광복 후 다시 통영으로 돌아와 통영공립고등여학교 음악 교사에 취임했다. 그는 시인 유치환·김춘수 씨들과 함께 1945년 9월 통영문화협회를 설립했는데, 그 활동의 결과가 지금도 남아 있다. ‘교가 지어주기 운동.’ 윤이상·유치환 씨는 당시 통영에 있던 거의 모든 학교의 교가를 지었고, 통영여중고·통영고·욕지중과 통영·충렬 초등학교 등 9개 학교가 그 교가를 수십년째 불러 왔다. 동베를린 사건 이후 윤이상씨의 작품은 이 땅에서 연주할 수 없는 금지곡이 되었으나, 통영 사람들은 윤이상의 노래를 일상적으로 부르며 성장한 셈이다. 통영 시민들이 윤이상의 귀향을 각별하게 환대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음악제의 장기적인 목표는 통영을 현대 음악의 산실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물론 그 중심은 윤이상 음악이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윤이상 음악을 제대로 듣고 연구하려면 반드시 통영으로 오게끔 할 계획이다.” 음악제를 주관하는 국제윤이상협회 한국사무국장 김승근씨는 “그러나 성급하게 키울 생각은 없다. 내년까지는 소규모로 하고 2002년부터 국제 행사로 전환할 것이다. 1차 목표는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17년 100곡 전곡 연주에 도전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윤이상씨의 작품은 서양 연주자가 공연 일정을 잡아놓고도 포기를 했을 만큼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다. 궁중 음악과 같은 한국 고유의 멜로디와 리듬을 담아 ‘한국 정서를 서양 악기로 표현하게 한다’는 평을 듣고 있기 때문이다. <교향곡 제2번>을 초연한 창원시향 지휘자 김도기씨는 전기에 감전되는 듯한 짜릿함을 맛보았노라고 말했다. 윤이상씨의 곡은 ‘결국 우리 작품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장 연주를 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제일 유명한 한국 현대 음악이라는 얘기이다. 작품으로 40여년 만에 귀향한 한국 출신의 이 거장은 지금 베를린 유공자 묘역에 묻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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