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한국에서 방영되었다는 <무한도전-올림픽대로 듀엣가요제>를 이곳에서는 일요일 오후에 보았다. 인기있는 '예능인'들이 나와 노래를 재미나게나 부르겠거니 했더니, 왠걸, 나는 가요제 내내 눈을 떼지 못했다. '무한도전'답게 그같은 통념을 가볍게 깨어버렸기 때문이다.
가요제전이라고는 하나 한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뮤지션과 엔터테이너 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아, 새로운 형식으로 꾸며놓았으니, 나같은 사람에게는 맛있는 종합선물세트로 보였다.
음악적 완성도도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음악 프로그램이 아닌 예능 프로그램에서 음악의 최고를 맛보게 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오프닝 무대에 섰다가 공연을 마치고 내려온 윤도현이 "나, 이런 건 줄 몰랐어"라고 푸념하는 것은 "가볍게 생각하고 왔더니, 장난이 아니네"라는 고백으로 들렸다. 그의 푸념처럼, 윤도현이 가진 파워가 무색할 지경이었다. 윤도현도 가요제가 이런 건 줄 알았더라면 저렇게 맥없이 물러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윤도현을 무색하게 만든 주인공들은 내가 보기에, 단연 윤미래(위 사진)와 이정현, 그리고 제시카였다. 이민을 오기 전에 한류 스타로 부상한 이정현은 인터뷰한 적이 있으나 윤미래와 '소녀' 제시카는 '개인'으로는 처음 보는 무대였다.
가요제에서 유재석팀인 '퓨처라이거'가 대상을 거머쥐게 한 공로자는, 내가 보기에 윤미래였다. 윤미래의 가창력은 놀랍도록 탁월했다. 유뷰브에서 찾았더니, R&B 전문이자 뛰어난 랩퍼였다. 이미 그렇게 평가 받았겠으나 한국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여성 힙합 가수가 아닌가 싶다.
윤미래는, 다소 경박한 가사로 가볍게 흘러버릴 수 있었던 댄스음악 노래를 빼어난 오로지 노래 실력하나만으로 고급스럽게 끌고 나갔다. 가수가 아닌 유재석의 노래를 제대로 커버하며 이끌어가는 실력.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미는 실력.
"쟤 누구야?" 하며 유튜브와 기사를 뒤져보았더니, 내가 떠난 사이에 한국에서 정상에 오른 실력자였다. 미리 녹음한 음악과는 아랑곳없이 분위기에 맞춰 다른 목소리로 끌고가는 그 음악성에 놀랐다. 작곡가 타이거JK는 자기 색깔을 많이 희석시켜 곡을 쓴 듯했다. 타블로가 그랬던 것처럼.
이로써 나는 윤미래와 그의 남편이라는 타이거JK의 열혈팬이 되었다. 한국에 있었더라면 100% 인터뷰 감이다.
가수 이정현이, 영화 <꽃잎>으로 데뷔한 후, 이른바 테크노전사라 불리게 되었을 때, 나는 그녀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질문에 기대했던 답변이 나오지 않아 다소 실망한 기억이 난다.
지난번 우연히 본 예능프로그램 <야심만만2>에서, 그녀는 나이가 많이 들어보였다. 그곳에서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면서 "쟤 나이 먹더니 더 쎄졌네" 싶었는데, <무한도전> 가요제를 보면서 그녀의 진면목을 새삼스럽게 발견했다. 카리스마와 '썬파워'.
전진과 함께하는 무대를 보니, 그 카리스마와 폭발적인 파워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타고난 것이다. 한국 여자 가수 중에 저렇게 '쎈' 가수를 본 적이 없다. 아무리 가창력이 뛰어난 어느 누구도 이정현의 타고난 폭발력은 따라갈 수 없다. 목소리에 카리스마가 실려 있을 뿐 아니라, 댄스는 또 어떤가. 전진의 저음이 그 뜨거움을 가라앉혔기에 망정이지, 이정현은 어디로 튈지 불안할 지경이었다.
"하, 하, 하, 미쳐"라는 가사가 맴돈다. 노래 마지막에 물통을 들어 머리에 들이붓는 모습을 보시라. 카리스마 작렬. 나는 내 몸이 터지는 줄 알았다. http://www.youtube.com/watch?v=GIwi9tWaINI
과거 이정현에게 질문한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물어보지 않고, 그냥 보고 쓰면 될 것을…. 무대에서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는 스타일인데…. 대기실에서는 "다음에 우리 무대인데, 큰일났다"는 탄식이 터져나올 법했다.
노래 중에서, 귀에 가장 쏙 들어온 곡은 박명수와 제시카(위 사진)가 함께 부른 <냉면>이었다. 최근 나는 소녀시대와 원더걸스의 노래를 함께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두 팀은 차원이 달랐다. 원드걸스는 가사와 곡이 '저질'로 떨어지지 못해 안달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반면 소녀시대는 이름답게 소녀답고 상큼했다.
박명수와 함께한 제시카는, 노래를 참 열심히 불렀다. 아이돌 가수치고는 예쁘게 잘 불렀다. "천재 작곡가 E-Tribe"가 썼다는 곡도 상쾌 상큼했고, 무엇보다 제시카의 풋풋한 매력이 흘러넘쳤다. 박명수만 제대로 해주었다면 손색없는 1위 후보곡.
이제, 나름대로 순위를 매겨보자. 한때 어느 가요제의 심사위원으로 참가했고, 대학가요제를 보면서 90% 이상의 적중률을 보인 바 있는 '감각'이다. 믿거나 말거나…ㅎㅎ.
내가 뽑은 대상은 전진과 이정현 팀이다. 이정현의 카리스마는 무대를 압도했다. 한 가지 흠은, 다른 팀과는 출연자 두 사람 모두 프로페셔널 가수였다는 점. 전진이 가수가 아니었다면 단연 1위.
금상. 윤미래의 가창력이 절대적으로 돋보인 유재석팀. 타이거JK가 쓴 곡도 뛰어났으나 힙합 가수들이 부르는 댄스음악의 묵직함. 댄스가수들에게서는 이런 묵직함이 나오질 않는다.
은상. 박명수와 제시카팀. 박명수의 실수가 뼈아프다. 간염과 황달로 최근 병원에 실려갔다니, 이 정도 해준 것만 해도 가상하다. 아저씨의 실수에 아랑곳 않고 어린 제시카는 고군분투했다. 돋보였다. 박명수의 실수만 아니었다면 1위도 거머쥘 수 있었다.
동상. 정준하와 애프터스쿨. 윤종신의 감각적인 곡도 곡이지만, 묘하게 여운이 남는다. 특히 "영계백숙 오오오오오" 하는 대목. 결정적인 흠은 무대가 너무 단조로웠다는 점. 특히 정준하의 단순한 안무가 눈에 거슬렸다.
나는 김태호 PD의 우직하면서도 탁월한 연출력에 감탄하면서도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왜 많은 청중을 앞에 두고 정식 공연을 하지 않았느냐는 것. 이 정도의 음악과 스타들이라면 장소 섭외와 청중 동원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텐데….
방금 뉴스에 오른 것을 보니, 이 가요제 출전곡들이 차트의 상위권에 랭크되었다고 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저 재미만 있을 것이라는 통념을 깨고 저렇게들 잘 쓰고 잘 부르며 즐거움을 주었으니… .
이 글을 쓰다보니, 우리 집 다른 방에서도 이정현 전진의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오늘 하루 우리 집도 저 곡으로 평정되었다. 캐나다 토론토에서도 이렇게 재미나게 보았다니, 그것만으로도 또 재미나지 않는가. 새벽 1시30분까지 잠안자고 이렇게 글을 쓰게 하고 있으니…, 고료 받기로 하고 약속된 글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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