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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살이

캐나다가 선진국임을 다시 체험하다



  사람의 생각은 늘 그런 것 같습니다. 자기가 안고 있는 문제가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것이며, 자기가 누리는 행복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아니라고 여깁니다.

  한국에서의 삶도 그러하겠지만 좀더 나은 삶을 바라고 온 캐나다에서도 생활 자체가 고단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살다 보니 사람사는 곳은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에서의 고단함은 끝났으나 캐나다에서의 색다른 고단함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생활에 묻히다 보면 캐나다에서의 삶 또한 한국과 그다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지지고 볶고 살면서 한국에서 하지 않던 고민을 새로 하게 되니, 한국에서의 고단함이나 이곳에서의 그것이나 오십보백보입니다. 새로운 곳에 살러 왔으니 이곳 환경에 충실하게 살려고 애쓸 따름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가끔씩 캐나다가 선진국이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체험합니다. 잊을 만하면 새로운 경험이 생겨나니, 저로서는 어쩌면 행운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몇년 전 제가 써서 펴낸 졸저 <느리게 가는 버스>(강출판사)에 캐나다의 The Hospital for Sick Children(SickKids)이 얼마나 대단한 곳인가 하는 것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의료 시스템에 대한 놀라움도 컸지만 말 그대로 '인술'을 펼치는 이곳 의료진의 면모에 크게 감동했었습니다. 한국에서 온 지 얼마되지 않은 저로서는, 한국과 캐나다의 경험을 마치 도표를 만들듯 평면 비교할 수 있는 계기를 얻기도 했습니다.

    성우제 사진

The Hospital for Sick Children(SickKids)의 내부 풍경.  세계 최고의 어린이병원으로 손꼽히며, 캐나다의 자랑이다. 캐나다의 많은 가정이 이 병원에 소액 기부금을 내고 있다.  위의 사진은 내부 정경. 병원이 아닌 어린이 놀이공원 같은 느낌을 준다.


  지난 열흘 동안 비슷한 경험을 또 했습니다. SickKids에서 인공 와우(Cocler Implant) 수술을 받았던 큰 아이가 한국에 들어갔다가 Device를 잃어버렸습니다. 기기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친구들과 롯데월드에 갔다가 놀이기구를 타는 와중에 날아가 버렸다고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놀이공원이 문을 닫은 다음 롯데월드 직원들이 기기를 금방 찾아주었습니다. 그 넓은 곳에서 작은 기기를 찾아낸 롯데월드 직원들의 성의와 신속함이 놀랍습니다. 

   문제는 바깥의 소리를 머리 안으로 들여보내는 그 기기가 온전한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기기 회사에 급히 찾아갔답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기기인 만큼 예상했던 대로 고장이 나 있었고 고치기가 어렵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같은 회사의 기기를 쓰는 것이 확실하니, 다른 기기를 잠시 빌릴 수는 없겠는가 하고 문의했더니 절차가 아주 복잡했습니다. 기계를 아주 못 쓸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새로 구입하는 가격은 한국 돈으로 천만원이라고 합니다.

  이곳 SickKids의 담당자에게 급히 연락했습니다. 이메일을 보내자마자 금방 답이 돌아왔습니다. 희소식이었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우리 병원에서 미국 콜로라도에 있는 기기 본사에 아이의 자료를 보내면 새로 Mapping한 기기를 보내준다. 빠르면 이틀 안에 온다. 비용도 걱정마라. 옛것을 보내면 되고, 제반 비용은 우리가 책임진다. 먼저 본사에 연락부터 하라."

                                            구글에서 빌려온 이미지
 인공와우 수술 후 귀에 부착하는 기기. 이 기기를 통하여 외부의 소리가 뇌에 전달된다. 우리 아이의 사진은 아니다. 

  콜로라도에 있는 본사에 전화를 해서 새로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동시에, SickKids는 자료를 그곳으로 보냈습니다. 본사에서 전화를 받는 이는 더없이 친절하고, 부드럽게 위로를 했습니다. 

   "아무 걱정하지 마라. 자료를 받는 대로 최대한 빨리 만들어 캐나다 토론토로 보내주겠다. 배달하는 날에 휴일이 끼면 특송료는 우리가 부담한다."

  8월초 캐나다에 연휴가 끼어 있는 바람에 자료를 보내는 시간이 조금 늦어졌으나, 기기는 사고가 난 지 1주일 만에 토론토의 우리 집으로 정확하게 전달되었습니다. 서울에서 전혀 듣지 못해 답답해 하는 아이와 주변 사람들을 생각하면 속이 탔습니다. 기기를 받기 하루 전 콜로라도의 본사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오늘 오후 FeDex로 보냈다. 지금은 캐나다의 어디에 가 있다. 한 나절 만에 갔으니 럭키하다. 내일 정오에 집에 도착한다. 트랙킹 번호는 몇번이다"라고 친절하게 답해주었습니다.

 인터넷에서 트랙킹 번호를 넣었더니 어디에 있다는 표시가 나왔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FeDex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만큼 초조했습니다. "지금 배달하는 차가 어느 주소에 가 있는데, 당신 집에는 낮 12시에 도착한다"고 답했습니다. 아예 바깥에 나가 기다렸습니다. 배달 차량은 정확히 11시50분에 집앞에 와서 물건을 전해주고 갔습니다.

  한국에 들어가는 이를 수소문했습니다. 그 다음날 저녁 비행기를 타는 선배 편에 기기를 보냈습니다. 인천공항에 아이가 나와서 기기를 받았습니다. 아이는 소리를 오랜만에 듣는 소감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근데 웃긴 건 2주 만에 음악 드는 거라서 나도 모르게 감동이 북 받쳐 올라서 약간 울 뻔했다는 것.ㅎㅎ 이게 여자 팬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가 노래할 때 북받쳐 오는 감동일듯?"

  그 정교한 기기를 고장난 지 2주 만에 정확하게 전달해 소리를 되찾게 된 것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서울에서 캐나다로,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다시 미국에서 캐나다로, 캐나다에서 서울로 보내어 아이가 소리를 듣게 된 것이 열흘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캐나다가 선진국임을 새삼 체험했다는 것은 천만원이나 하는 기계를, 애초에 무상으로 제공하고, 고장이 났는데도 모든 비용을 떠맡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것도 대단히 고마운 일이지만 어떤 절차보다 사람을 우선시하는 의료시스템의 태도였습니다.

   병원 관계자들은, 기기가 없을 때 아이가 겪을 불편함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들은 사람이 겪을 불편함과 그 고통을 가장 먼저 생각합니다. 기관과 사람 사이에 거쳐야 할 절차는, 그 불편함 앞에서 모두 무시됩니다. 사람이 겪을 불편함을 가장 먼저 신속하게 해결한 다음, 나머지 절차를 진행합니다. 서울에서 망가진 기기를 아이가 돌아와 콜로라도 본사에 보내기만 하면 됩니다. 반송 봉투까지 함께 보내왔습니다.

  서울은 달랐습니다. 기계를 고칠 수 있을지 여부도 불확실하지만 보내고 받는 데만 한 달이 걸린다고 했습니다. 캐나다에서 하는 일을 서울에서 못할 리가 없고, 그 비용 문제는 나중에 정리하면 그만입니다. 빌리자고 하는 데도, 절차상의 어려움을 들어 난색을 표했습니다. 

  병원이든, 불편한 이들이 찾는 재활센터든, 아니면 장애인들의 기기를 담당하는 기관이든 간에,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것은 '사람의 불편함을 어떻게 하면 빨리 정확하게 없앨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캐나다에 처음 오는 한국 사람들은 캐나다의 제반 행정 절차가 느려 터져서 짜증을 내기 일쑤입니다. 버스 운전 기사가 버스를 세우고 커피를 사들고 오는 곳이 토론토입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일이 생겨나면, 번갯불에 콩구워먹듯 전광석화처럼 일을 해치웁니다. 절차상의 이유를 들어 지체하는 일은 없습니다. 사람을 위해 하는 일을 앞에 두고 인위적인 절차라든가 책임 소재 따위를 따지며 시간을 끄는 일은 없습니다. 

  선진국의 실제 내용이 어떠한 것인가를 다시 한번 체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