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람 이야기

기자로서 돈 받고? 노무현처럼 죽고 싶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신문 방송 블로그 들을 통해 보고 들으면서 여러가지 감회가 생겨납니다. 80년대에 20대를 보낸 사람들이라면 크게든 작게든 변혁에 대한 꿈을 꾸었을 것입니다. '노무현의 자결'은 바로 그 꿈의 좌절을 드러내는 뼈아픈 상징이 아닐까 싶습니다. 유튜브의 동영상을 보면서 눈물이 삐찔삐질 나옵니다. 


  편지로든, 블로그의 답글로든, 특히 외국에 사는 블로그 친구들이 몹시 우울하다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심경을 전해왔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진정성'이라는 말을 퍽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 진정성이 통하지 않은 것은 물론, 그것이 왜곡되어 화살로 돌아오자 그는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그의 자존심으로 보아 자결하는 것이 어쩌면 가장 쉬운 선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아니라는데, 사람들은 왜 나의 말을 믿지 않을까' 하는 절망에서 시작하여, 자괴 · 수모 · 치욕을 지나 사는 이유까지 되돌아보았을 것입니다. 

  노무현씨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일방적인 몰아붙이기 혹은 압박을 생각하다보니, 8~9년 전 제가 당했던 일이 다시금 생각났습니다. 물론 일의 크기나 압박의 강도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그러나 제가 가진 진정성이 다른 이에 의해 부정되고, 왜곡되고, 그것이 화살이 되어 되돌아올 때, 그 억울함이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가슴이 서늘합니다. 그것이 외국에 나와 살게 된 하나의 동기가 되었음은 물론입니다.

  뉴욕에 절친한 친구가 있습니다. 1996년 뉴욕에 출장갔을 때 만나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1990년대 초반, 중국에 출장을 가서 쓴 김산의 <아리랑> 추적 기사를 보고, 그때부터 저를 기억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편의상 A라고 하겠습니다. A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아낌없이 퍼주는 독특한 사람입니다.  어떤 댓가를 바라지도 않고, 그가 바랄 것도 없습니다. 

  뉴욕에 자주 드나들었으나, 회사에서 돈을 받아 정식 출장을 간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합병호를 내는 설날이나 추석 휴가를 주로 이용해, 제 돈으로 비행기 티켓을 샀습니다. 뉴욕에 누이가 살고 있으니, 숙식은 기본으로 해결했습니다.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뉴욕 가는 길에는 반드시 기사거리를 찾았습니다. 가끔 특종도 나왔습니다. 뉴욕 MoMA에서 전시중인 화가 이 불의 작품이 강제 철거되었다는 기사를 썼고, 뉴욕 무대에서 활동중인 여러 예술가들을 인터뷰했습니다. 미술관과 첼시 거리를 쏘다니며 그림을 보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A로부터 많은 도움을 얻었습니다. 새로운 예술 경향과 무수한 예술가를 소개받았습니다.

  IMF 구제금융 사태가 터지고, 회사 사정이 어려워졌습니다. 지급 보증의 희생양이 된 회사는 월급도 주지 못했습니다. 그 사정을 알고 A는 연락을 해왔습니다.
  
  "뉴욕 한번 다녀가라. 비행기 삯은 내가 댈께."

  이렇게 두 번을 다녀왔습니다. 홍혜경 이창래 니키리 이상남 조숙진 강익중 조상 등을 인터뷰하고 돌아와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비록 친구지만 A에게 너무도 미안하여 내가 한국에서 도와줄 것이 없을까를 물었습니다. A는 기자로서 얻을 수 있는 음반 자료를 구해서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매달 그것을 구해, 수년간 뉴욕으로 보냈습니다. 가격과 보내는 비용은 한번에 5만원 정도 들었습니다. 저는 빚을 다달이 갚아나간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백남준의 구겐하임 밀레니엄 회고전을 보고 싶어, 이번에는 제 돈을 들여 2000년 3월 3박4일 뉴욕 출장을 다녀온 저에게, 직장의 윗사람은 술자리에서 따지듯, 빈정거리듯 물었습니다.

  "너 기사 써주고 돈 받는 거지? 누구 돈 받아 그렇게 자주 뉴욕 드나드냐? 슈킹하는 재주 참 좋다."

  저는 슈킹이라는 말을 그 자리에서 처음 들었고 아직도 정확한 뜻을 모릅니다.  '기사'와 '외국 여행'을 거래하는 것으로 파악한 모양입니다. 저에 대한 모욕이자, 저를 성심성의껏 도와준 친구에 대한 모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한 반박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만한 일'이 도무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아무리 항변을 해도 내가 가진 진정성이라는 것은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논리에 따르자면, 저는 기자로서 돈을 받았고 그 댓가로 기사를 써준 것이 됩니다. 이러한 혐의는,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바로 먹혀듭니다. 회사 동료들을 붙들고 속사정을 설명할 수도 없고 하여 참 답답했습니다. '결백을 주장하며 내가 죽어야 믿겠나' 싶은 생각도 잠시 들었습니다. 내가 나에게 부끄럽지 않았으니, 그런  극단적인 생각은 잠시였지만 내가 가진 진정성을 알아주지 않는 분위기에 오만 정이 다 떨어졌습니다. 내가 있을 만한 곳이 못된다는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회사 생활에 대해서는 저 스스로 사망 선고를 내린 셈입니다.

  우리 회사는 창간 때부터 언론 사회에 관행이 되다시피 했던 촌지를 받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촌지도 거부해온 사람에게, 댓가성 기사를 썼다는 혐의는 참 잔인한 것이었습니다.

  기자 노릇을 하지 않은 지, 만 7년이 지났습니다. A가 댓가를 바라고 '기자'에게 호의를 베풀었다면 기자 노릇 그만두자마자 관계가 끊어졌을 것입니다. 지금은 외국에 사는 한국 사람의 처지가 되어, 예전보다 더 돈독한 사이가 되었으니 '거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증명되었습니다. 캐나다에 살러와서, 초창기에 벌이가 없던 시절, A는 뉴욕에 다녀가라고 비행기 티켓을 또 보내주었습니다.

  직장이라는 작은 조직 속에서도 진정성이 통하지 않고 오해를 받으니 죽도록 분하고 답답했는데,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어땠을까 싶습니다. 검찰 · 언론 · 정부가 한편이 되어 몰아붙일 뿐만 아니라, 망신과 수모, 모멸감을 안겨주고, 나아가 주변 사람, 자식들까지 모조리 잡아다 조사하는 상황에서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자결 외에는 자기의 결백을 증명하고 '토끼 몰이'를 멈추게 할 방법이 달리 없었을 것입니다. '걸면 걸리는 사안'을 가지고 모든 국민이 손가락질하게 만드는 쪽으로 죽으라 하고 몰아대니, 죽는 것 외에는 벗어날 방도가 없었을 것입니다. 

  퇴임한 지 1년밖에 안되는 국가원수를,  벼랑끝으로 몰아 등을 밀어버린 꼴입니다. 

   그래서 외국에 나와 사는 저같은 사람들에게도 그의 죽음은 더욱 안타까워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