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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이야기

공지영이 '부채386'보다는 낫겠다

   

  며칠 전 토론토에 후배 한 명이 느닷없이 나타났다. 바쁜 출장 일정 중에 2시간 정도를 빼 밤잠 줄여가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씨원한' 캐나다 맥주가 이야기 중간중간 끼여 있었고….

  한국의 새로운 소식과 분위기를 전하는 후배의 말 가운데 '부채 386'이라는 용어가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다.
  
  386이라는 용어에 대해 이제는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용어를 혐오한다. 첫번째 이유는, 386세대 전체가 마치 변혁 세력인 양 포장되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그 세대의 대표를 '80년대 학번' 곧 대학생으로 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 출신이 아니면 최소한 386이라는 용어에서는 소외될 수밖에 없다(작고한 문학평론가 이성욱이 일찍이 지적한 바다).

  어쨌거나 '부채 386'이라는 용어는 바로 그 386에서 파생한 신생 언어이다.

  그 후배에 따르면, 한국 사회가 시끄러운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 '부채 386' 때문이다. 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면서, 데모는 하지 못했던 사람들, 그러나 데모를 열심히 한 동료 친구들에 대해 늘 부채감을 마음 속에 품고 살아온 사람들. 그들이 바로 '부채 386'이라는 것이다.



  80년대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들은, 대부분 정치권에 들어갔거나 심지어는 극우익의 선봉에 서 있는 자도 허다하다. 그들은 부채감이 별로 없이 홀가분할 것이다. 정치권에 들어가 변절했다고 4·19세대를 비난하기는 했으나, 이 세대에서도 정치권에서 일할 사람은 필요하니, 변절을 했든 변질되었든 정치권에 들어간 것은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또 가장 정치를 잘 할 사람들이기도 하다.

  문제는, 운동의 주도 세력도 아니면서, 마치 80년대를 평생의 아픔 혹은 부채감으로 마음속에 품고 있는, 나같은 '어중띠기'들이다. 직장에 나와서는 80년대에 20대를 보낸 사실을, 마치 대단히 정의로운 시대에 산 것인 양 으스댔다. <말>지나 <한겨레>는 언제나 옳았고 <조선>과 <경향>은 언제나 악이었다(80년대에는 경향신문이 극우익신문이었다). 돌이켜보면 그같은 경향이, 직장생활을 했던 90년대 내내 지배했던 것 같다. 비단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세대 자체가 은연중에 그렇게 세월을 보내온 것 같다.

  요즘 한국 사회를 시끄럽게 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386 세대의 부채감이라고, 후배는 전했다. 과거 하지 못했던 '투쟁'을, 마음 속에 품은 빚감정 때문에 더 격렬하게 하는 세력이 있다는 얘기다. 전교조가 대표적이라고 했다.

  좋게 생각하면 마음의 상처가 아직도 깊게 남아 있어 참 아리고 안쓰러워 보인다. 

  나쁘게 보면, 과거의 부채감에 얽매여 세상사를 판단한다는 사실이 참 안타깝다. 과거 '어중띠기'로서 학생운동에 투신하지 못한 것보다, 지금 부채감에 얽매여 행동하는 것은 훨씬 위험한 일로 보인다. 사회의 중추 세대가 되었으므로, 이들의 '운동'은 과거 학생운동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그 영향력이 크고 중요하다. 

  그 힘과 영향력이 '부채감'에 의해 오용 혹은 남용되지는 않는 것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만약 과거의 부채감이 판단을 흐리게 한다면, 80년대 학생운동을 신나게 팔아먹는 공지영의 소설보다 훨씬 더 나쁘고 위험하다. 공지영이야 한번 읽고 잊고 버리면 그만이지만, 386의 영향력은 한국 사회를 움직이기 때문이다.

  김훤주의 블로그에서 작금의 운동세력에게 자기 성찰을 주문하는 주대환씨에 관한 글을 읽다가, 다시금 후배의 말을 떠올렸다. 과거 부채감에 시달릴 것이 아니라, 과거의 변혁 정신을 좀더 유연하고 리버럴하게 세상사를 판단하는 쪽으로 변화시켜나간다면 참 좋을 것이다. 주대환씨 같은 분들이 많아져야, 그같은 분들의 '말빨'이 통해야 한국 사회는 밝고 건강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