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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문학

29년 만에 공개하는 고 기형도 시인의 편지


  지난 3월7일은 기형도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25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1989년 3월8일 정오 무렵 전화를 받은 아버지께서 놀란 얼굴로 "형도가 죽었다는구나" 하셔서 저는 그 소식을 처음 듣게 되었지요. 그날 제 아버지는 서대문 적십자병원에 빈소가 차려졌는데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며 신부님을 모시러 가야겠다고 급히 나가셨습니다. 


  기형도 시인은 내 형 성석제와 대학시절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1979년 이후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 집을 드나들어서 우리 식구들과도 형 못지 않게 친했습니다. 당시 형도 형은 시흥군 소하리에 살았습니다. 신촌에서 버스를 타면 우리 집이 있는 독산동을 지나게 되어 있는데, 석제 형이 없어도 집에 찾아와 놀다가곤 했습니다. 놀아도 그냥 노는 것이 아니라, 집안 어른들을 즐겁게 해주는 특별한 재주가 있어서 매일 찾아와도 어른들이 좋아하는 거의 유일한 존재였습니다. 할머니 말씀이 생각납니다. "형도는 김치 하나를 먹어도, 우째 그래 맛나게 먹노? 우리 집에서 먹으면 밥도 맛있다는 소리를 백 번도 더 한데이." 형도 형의 립서비스는 본인 스스로도 감동해 넘어갈 만큼 환상적이었습니다.  


   형도 형뿐만 아니라 내 형의 문학회 친구들이 우리 집에 와서 자고가는 날이 부지기수여서 형과 함께 방을 쓰던 나도 늘 거기에 끼여 잠을 잤습니다. 그들과 동침하지 않는 날이 드물 지경이었습니다. 성원근 오봉희 이성겸 이영준 권진희 기형도 조병준 원재길, 나중에는 고영범 김성윤 박해현까지.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한 방에서 먹고 마시고 자며 함께 비볐으니, 말없는 내 형보다 말 많은 형도 형에게 내 비밀을 털어놓은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형도 형의 장기는 주변 사람들을 늘 칭찬하고 힘을 불어넣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 석제 성적이 올 A야. 법대 전체 수석이지. 흠, 그런데 유일한 흠은 말이지? 자기 과 과목이 하나도 없다는 거야. 낄낄..." "이번에 병준이가 쓴 시, 죽인다, 죽여, 한번 들어 볼래?" 이런 식입니다. 약간 씨니컬한 듯하면서도 사람을 기분좋게 하는 절묘한 말재주가 있습니다. 더불어 남의 귀에 거슬리지 않게 자기 자랑 하는 재주가 뛰어났고 자기가 소속한 집단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자랑과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중앙고와 연대 자랑은 하도 들어서, 나는 우리나라에서 두 학교가 가장 좋은 학교라고 잠시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토요일에는 바둑을 두고 노래도 하면서(술은 잘 마시지 못했습니다) 밤새 노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부모님이 일요일 새벽 미사를 가면 형도 형이 친구들을 선동해서 따라 나섭니다. 그리고는 미사 시간에 성가를 얼마나 크게 잘 부르는지, 신부님과 다른 신자 들이 가수가 왔나 싶어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처음 보는 노래도 악보를 보고 그렇게 잘 불렀습니다. 형도 형은 조용필 노래도 개성있게 소화하는 빼어난 미성이었습니다.


  1984년 가을 중앙일보에 기자로 입사해서도 여전히 집에 찾아왔습니다. 어느날 밤, 석제 형과 방에 있는데 갑자기 박해현 형이 얼굴을 슥 들이밉니다. 내 대학선배의 친구인 해현이 형이 어떻게 우리 집을 알고 찾아왔을까 놀라워 하는데, 박해현 형이 되려 나한테 묻습니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자기는 기 선배가 좋은 곳 있다고 가자고 해서 따라왔다는 겁니다. 중앙일보 문화부에 후배로 들어온 박해현이 마음에 들었던지 서울 최남단 독산동 우리 집까지 끌고 온 것입니다. 박해현 형은 좋은 곳이라고 해서 으슥한 곳에 있는 비밀 요정인 줄 알고 속으로 좋아했다고 했습니다. 


                                    중앙일보 기자 초년병 시절의 기형도 시인.

  

   우리 집이 일종의 아지트가 되었으니, 내 형 친구들은 우리 식구들과 스스럼이 없었습니다. 특히 형도 형은, 저녁 때 야근 중이라며 시도 때도 없이 우리 집으로 전화를 걸어, 누가 되었든 전화를 받는 사람과 한참 수다를 떨었습니다. 자기 친구인 내 형을 바꿔달라는 소리도 하지 않았습니다. 석제 형이 입대를 했을 때도, 혼자 찾아오거나 전화를 걸어 상대가 누가 되었든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끊었습니다. 늘 입에 달고 살던 말이 "아, 오늘, 오빠, 너무 피곤하다, 피곤해"였습니다. 형도 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다음, 유고집을 낼 때나 추모 행사를 할 때나 늘 함께 했던 친구들은 그때 우리 집에서 함께 뒹굴던 형들입니다. 


  오늘, 쓰려고 했던 것은 이 내용이 아닌데 서론이 길었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1985년 대학 4학년 봄에 오탁번 교수가 강의하는 <현대시선독>이라는 과목을 국어교육과에 가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오 선생은 이 강의를 참 재미있게 진행했습니다. 교정에 핀 목련 꽃을 따다가 노트에 붙이라고 하질 않나, <국화 옆에서>는 변죽을 울리며 허풍을 떨고 있으니 허풍 떠는 시를 써오라고 하질 않나, 어쨌든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 재미있는 강의였습니다.



  오탁번 선생님은 시험 대신 과제를 내주었습니다. '현역 시인에게 편지를 써서 답장을 받으라.'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답장을 받아와야 성적을 얻는 것이고, 답장을 못 받으면 학점은 펑크나게 되어 있습니다. 나한테는 정말 쉬운 숙제였습니다. 기형도 형이 그해 초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안개>로 등단했기 때문입니다. 


  4월19일자로 엄살을 떨어가며 편지를 썼습니다. 오 선생은 '작품을 평하고 답을 얻어오라'고 했는데 시집을 내지 않았다는 이유를 대면서 '시인은 세상을 어떤 눈으로 바라봐야 하는가'라는,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한 질문을 했습니다. 추상적이고 큰 질문이어서 대답하기가 곤란했을 터인데, 형도 형은 4월30일자로 편지를 써서 보내왔습니다. 나는 그 편지를 공책에 붙여 제출했고 그 과목 점수는 A플러스를 받았습니다. 수습을 막 끝내고 정치부에 배치된 1년차 기자로서 정신없이 바쁠텐데도, 시간을 내어 답장을 해준 스물다섯 기형도 형의 배려가 고맙고 놀랍습니다. 내가 그 처지였더라면 그런 친절을 배풀 수 있었을까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이사를 다니는 와중에, 대학노트를 다 버렸으나 형도 형의 편지 때문에 이것 하나만은 끌고 다니다가 캐나다에까지 가지고 왔습니다. 얼마 전 기형도 시인 25주기 추모의 밤을 한다는 뉴스와, 광명시에 기형도문학관이 몇년 후 들어선다는 뉴스를 접하고 이 편지를 떠올렸습니다. 사망하기 4년 전 등단하자마자 쓴 육필 편지 내용이 시인을 이해하는 데 작게나마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학관에서 원한다면 당연히 이 노트를 보낼 생각입니다.


  과거, 보들레르의 시를 배울 때 들은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이브 본느프와인가, 확실하게 기억은 나지 않는데, 어쨌거나 유명한 보들레르 연구자가 "아주 중요한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며 발표장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가 발표한 것은 보들레르가 창녀인 잔느 뒤발과 동침한 호텔의 방 번호가 313이 아니라 314호라는 내용이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