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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문학

미실의 편이 되어 '선덕여왕'을 보라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다는 드라마 <선덕여왕>이 바다 건너 캐나다에서도 큰 인기를 모으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방영한 지 서너 시간만 지나면 시청할 수 있으니, 한국에서의 인기가 캐나다에서도 똑같다고 보면 됩니다.

  외국에 살다보니 한국 드라마에 더 몰입하는 경향이 있는데, 순전히 인터넷 덕에 단 한 편도 빼놓지 않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조롭기 그지 없는 외국생활에서 한국 드라마는 청량제입니다. 캐나다에 사는 중국 필리핀 등의 외국 사람들이 한국 드라마에 거의 넋을 빼앗기다시피 하는 판국이니, 더빙도 자막도 필요로 하지 않는 우리로서는 복 받았다는 생각마저 들 지경입니다.

  이곳 시간으로 오늘 천명공주가 독화살을 맞고 죽었습니다. 동굴 속에서 덕만이 우는 장면은 전율을 일으킬 정도로 실감이 났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나는 덕만이 편이 되어 드라마를 보는 거지?'

  사실 드라마는 선악 구분이 명확하게 이루어져야 재미가 있습니다. 선악 구도를 분명히 하지 않은 채 재미나게 만들기는 참 어렵습니다. 오래 전에 방영된 <내 이름은 김삼순> 정도가 그런 유형에 속했습니다.

  <선덕여왕>이 나같은 평범한 시청자들을 사로잡는 이유는 한 쪽편에 붙어 죽으라 하고 응원하게 하는, 상대편은 또 죽으라 하고 미워하게 하는 명확한 선악 구도 때문입니다. 덕만을 대표선수 혹은 얼굴마담으로 세운 덕만이파 사람들은 한결같이 착하고, 우직하고, 정의롭습니다. 누구 하나 악한 사람이 없습니다. 사기꾼 소매치기 도적 등 여러 직업 동시다발로 가진 악한들마저도 덕만이 편에 속하면 본성이 착하고 의리파입니다. 게다가 그들이 벌이는 도적 행각은 악해보이지 않고 그저 웃기고 재미있습니다. 

  반면 미실이 이끄는 미실편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악하고 불의와 타협하고, 때로는 멍청하기까지 합니다. 지위, 연령 불문하고 한결같이 그렇습니다. 나라를 위해 싸우는 화랑들마저도 덕만이 편은 착하고, 미실이 편은 악합니다.

 그래서 저는 시청자 모두가 덕만이 편이 되어 있으니, 재미삼아 미실이 편이 되어 드라마를 보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권력을 두고 두 계파가 치열하게 다투는 것이니, 어느 한 편이 정의롭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형편입니다. 덕만이파는 미실에게 빼앗긴 권력을 되찾으려고 안간힘이고, 미실이파는 그 권력을 더 공고히 하려고 애를 씁니다. 누가 착하다, 악하다고 말할 형국은 아닙니다. 어차피 권력투쟁이니까.



  "할일없어 별짓 다한다"는 비난이 들려오기는 합니다만, 할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할일이 태산같은데도순전히 재미를 위해, 그리고 이왕 보는 거 고정관념을 깨고 좀더 재미나게 즐기려고 미실이 편이 되어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미실은 대단한 여장부입니다. 그 많은 남자들을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도 아닌 것이 수십년째 권력을 유지하고, 안개 정국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헤쳐나갑니다. 반대파가 결사적으로 숨기려고 하는 일을 끝까지 추적해 파헤치고, 남다른 정보력으로 언제나 한발 앞서갑니다.

  기후나 일식을 미리 예측하여 정치에 이용하는 것은 능력이지, 사술은 아닙니다. 덕만이 편에서도 능력만 있다면 틀림없이 그리 했을 것입니다.

  천명공주가 죽은 것은 미실측의 잘못이지 미실의 잘못은 아닙니다. 카리스마와 자신감 넘치는 미실은 누구를 죽여 문제를 푸는 장난을 치지 않습니다.  "하늘이 나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늘을 움직인다"는 당당한 자신감이 있습니다. 치사하게 있는 쌍둥이를 없다고 우기며 뒤로 빼돌리는 거짓말도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드라마에서는 미실이 등장할 때마다 미실만의 배경음악을 깔아주어 카리스마가 더 빛납니다. '어디서 굴러먹다가 등장한'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덕만이가, 수십년 권력을 공고히 하며 신라를 움직여온 미실에게 대든다는 것 자체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꼴입니다. 일개 낭도 신분의 덕만이가 정치를 알면 얼마나 안다고 왕보다 더 큰 권력을 쥐고 나라를 경영해온 미실에게 감히 도전할 수 있는지, 그 도전 자체가 말도 안됩니다. 이건 헤비급과 플라이급의 차이보다 더 큰 실력차가 느껴집니다.

  게다가 그 주변 인물은 어떻습니까? 덕만이 파는 한결같이 허접합니다. 자기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는 촌뜨기 화랑 김유신과 가야 출신의 집안, 어쩌다가 덕만의 덕을 본 알천랑, 천둥벌거숭이 비담, 실권도 없는 관료, 언제나 미실의 눈치를 보는 왕, 그리고 사기 소매치기 전문 불량배 등이 전부입니다.

  반면 미실이 파의 면면은 얼마나 화려합니까? 모두가 당대 최고의 엘리트입니다. 테크노크라트 미생랑, 화백회의를 주재하는 상대등 세종, 군권을 쥔 설원랑, 설원랑을 따르는 뛰어난 화랑 등 최고들이 미실이 파에 포진해 있습니다. 최고의 엘리트가 되기 위해 그들은 수련에 수련를 거듭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드라마는 김유신이 바위를 치며 무식하게 수련하는 모습만 보여줍니다. 처음부터 시각 자체가 삐딱합니다.

  결국 앞뒤 분간 못하는 촌뜨기들이 권력 한번 잡아보겠다고 신라 최고 엘리트들에게 도전장을 내민 꼴인데, 실력으로는 도대체 맞장을 뜰 수 없으니 천명공주의 죽음이나 하늘의 도움, 나아가 시청자의 성원까지 업으려 합니다. 사다함의 매화를 얻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하고 공을 들이는 미실에 비해, 허술하고 비겁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차피, 드라마는 역사적 사실에서 비껴가게 마련입니다. <선덕여왕>은 외피만 빌려왔을 뿐 다른 드라마보다 역사적 사실에서 훨씬 더 벗어났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재미삼아 미실의 편이 되어 보니, 색다른 재미가 있습니다. 그렇게 보니 고현정의 연기와 미모는 대단히 뛰어납니다. 연기와 미모에서도 가장 돋보이니, 주인공은 주인공인데 결국 하룻강아지 덕만이에게 무너진다니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아, 불쌍한 미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