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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이야기

고대 교수들, 고민 참 많겠다


  

   절친이자 후배인 K가 "제발 한국 정치 이야기 좀 그만 쓰라"고  충고를 해왔다. 한국 정치에 대해, 속된 말로 쥐뿔도 알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이민을 오던 해에 이곳의 일부 한인들이 정치를 비롯한 한국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코믹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에 관한 정보를 방송이나 인터넷을 통해 아무리 상세하게 전해 듣는다 한들, 몸을 한국에 담그지 않은 이상 제대로 느낄 수가 없다. 느낄 수가 없는데, 알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이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강 건너 불 구경을 하면 그 규모를 한눈에 볼 수 있겠다"고 썼더니, 어떤 분이 "전체는 볼 수 있으나 그 뜨거움은 느낄 수 없다"는 댓글을 달았다. 정확한 지적이다.

  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외국에 살면서 한국의 상황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이 좀 우습다. 내가 처음 이곳에 와서 느꼈듯이, 한국에 있는 이들에게 코믹하게 보이지나 않을까  염려스럽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알아야 쓰는 것이고, 알 수 없으면 쓸 수도 없는 것이니, 코믹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는 척' 하는 것만 경계하면 되겠다 싶은 생각도 든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에라, 모르겠다. 쓰고 싶은 대로 쓰자"는 생각에 이른다. 그래서 주저하다가 다음 글을 결국 쓰게 된다.

  요즘 한국에서는 대학교수들의 시국 선언이 들불처럼 번져가는 모양이다.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그렇게 번지는 것은 1987년 전두환씨의 이른바 4 · 13 호헌 선언 이후 처음이 아닌가 싶다. '호헌 철폐'를 요구하는 시국선언이 고대 교수들에 의해 처음으로 터져나온 후 교수들의 시국선언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번져나갔고 급기야 6월 항쟁으로까지 이어졌다. 

  1987년 4월 어느날, 내가 연구조교로 있던 이준섭 교수 연구실에 국문과 김흥규 교수가 찾아왔다. 소파에서 이선생과 마주한 김흥규 선생은, 구석 책상에 앉아 있던 나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 의미를 알아챈 이선생은 "잠깐 밖에 나가 있으라"고 했다. 나는 그때 직감적으로, 시국선언 동참을 권유하러 왔구나 하고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 고대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터져나왔고, 그 선언은 전두환씨의 호언 선언을 깨는 기폭제가 되었다.

  고대 교수들은 시국선언을 아주 시의적절하게 했다.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맞추어 먼저 치고 나갔다. 치고 나가면 그 뒤를 다른 대학교수들이 이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타이밍까지 정확하게 맞추었다. 1987년 고대 교수들의 시국선언은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고 대통령직선제까지 이끌어냈다. 비록 죽을 쑤어 개에게 안겼지만서도….

  
1960년 당시 4 · 19를 이끌어낸 학생들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던 조지훈 선생이 쓴 글이다. 고대 호상에 적혀 있는데, 저 탁본을 나는 캐나다에까지 끌고 왔다. 아내의 동아리 친구들이 집들이 선물로 가져온 액자라서…. 버릴까 생각도 했는데 요즘 보니 끌고 오길 잘 했다. 탁본이 아주 근사하다.
  

  1987년보다 더 시의적절하고 절실했던 시국선언이 있었으니, 바로 1985년 봄의 시국선언이었다(일부 신문에서는 1986년 3월이라고 하는데, 내 기억이 정확할 것이다. 대학원 지도교수 김화영 선생이 프랑스에 연구교수로 가 계셨던 탓에 서명 못했던 것을 무척 아쉬워 하셨던 기억이 난다. 김선생님은 1986년에는 학교에 계셨다).

   그 해 봄, 우리 대학에 대단히 신선한 뉴스가 유포되었는데, 바로 교수들이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는 것이었다. 내용은 민주주의를 실현하자는 기본적인 것이었으나, 전두환 철권통치하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데모를 하다가 잡혀들어가는 와중에, 대학교수들이 시국선언을 하리라고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시점에 터져나왔다. 가히 폭탄선언이었다. 아마도 김준엽 선생이 총장 자리에서 쫓겨난 것과도 관련되어 있지 않았나 싶은데, 그 선언은 한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전두환 정권이 불법으로 권좌를 탈취했다는 것을 지식인 사회에서 공개적으로 발표한 첫번째 선언이었다. 학생운동, 민주화 운동은 큰 힘을 얻어 전두환 정권을 압박했다. 1987년 4월의 시국선언보다 훨씬 값지고 용기있는 지식인들의 시의적절한 집단행동이었다. 20여명의 명단에는 김우창 선생도 들어 있어서 나는 감동했었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시기에, 절묘하게 타이밍을 맞추어 나온 고대 교수들의 시국선언은 1980년대에 기록된 고대의 가장 자랑스러운 유산이자 재산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20여년 만에 터져나오는 요즘, 고대 교수들은 속앓이를 엄청 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나의 동기와 후배들이 교수가 되어 연구하고 가르치는데, 그 친구와 후배들은 분명 1980년대의 시국선언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고민은 두 가지로 요약될 것이다. 첫번째는 이명박씨가 고대 출신이라는 점. 두번째는 '가장 먼저'라는 타이밍을 놓쳤다는 점. 80년대를 생각한다면 두번째 문제도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먼저 한다는 타이밍을 놓쳤다고는 하나, 첫번째 문제와 연관지어 생각한다면 늦게 하는 시국선언 또한 값진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여, 움직임이 있다는 말이 나오는 모양이다.

  그러나 교수들의 시국선언 파괴력은 확실하게 떨어진 것 같다. 조선일보 사설이 감히 개찌를 붙을 정도니 말이다. 과거 1단 기사로만 처리하던 조선일보가 교수들의 시국선언에 대해 사설에서 정면으로 까는 것을 보니 격세지감이 든다. 

  어찌 되었든 고대 교수들의 행동이 주목거리이다. 하든 말든, 해도 어떻게 하든,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