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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문학

오마이뉴스의 빼어난 서평

도로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올레길 화살표와 리본이 보이지 않는다. 코스를 벗어나 얼마를 걸었는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는다. 되돌아서 가는 길이 참 멀고 지루하다. 제주도에 온 이래 처음으로 나 스스로에게 짜증이 확 밀려온다. 길에서 벗어난 것이 문제가 아니다. 세상사에서 얻은 마음의 상처를 곱씹느라 길을 놓쳤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와서…. 그저 순하게 용서하자며 마음을 다잡는다. 다시 바다가 보인다.-<폭삭 속았수다>에서.

 

책을 읽는 것이 세상살이 그 무엇보다 즐겁다. 제목과 간단한 설명만으로 가졌던 기대 그 이상의 책, 맛깔스러운 책을 읽을 때 책을 읽는 즐거움과 행복은 더욱 커진다. 세상의 수많은 것들 중 하필 책을 좋아했음이 새삼스럽게 다행스럽다 싶고, 내 스스로에게 고마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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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삭 속았수다>
ⓒ 강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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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삭 속았수다>(성우제 지음, 강 출판사 펴냄)가 최근 이런 행복을 듬뿍 준 책 중 하나. 이 책은 2007년에 1코스 개장을 시작으로 2012년 현재 21코스를 개장한, 지선 5개를 포함해 총 26개 코스가 완성된 제주올레 완주기다.

 

제주올레 덕분에 전국에 '~둘레길' 혹은 '~자락길' 등과 같은 이름을 붙인 크고 작은 수많은 트레일이 생겨났다. 그와 함께 '걷기'는 하나의 문화 행위로 정착되었다.

 

전국에 걷기 열풍을 일으킨 제주올레인 만큼 사람들의 관심이 많다. 내 주변에도 제주올레를 걸었다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고 있고, 고향친구들도 두해 전부터 "우리도 제주올레 함 걸어보자. 가자! 언제 갈까? 올해는 정말 계획을 세워 꼭 가보자!"고 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주올레길은 내겐 '가보고 싶지만 너무 먼 곳'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한다는 것부터 부담스러워 막연한 거리가 느껴지는 그런 곳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언제든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인 데다가, 기사를 통해 낯익은 저자(원 <시사저널> 창간 멤버로 13년 동안 문화기사를 주로 썼다)의 책이기 때문이다.

 

이 남자의 제주올레 완주기, 인간냄새 물씬

 

여하간 우선 목적은 언제든 기회만 된다면 꼭 가보고 싶은 제주올레에 대한 정보나 좀 얻자 싶었다. 책을 모두 읽은 후 결론부터 말하면 이런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아니 기대를 훨씬 웃돌았다. 내가 얻고 싶었던 제주올레에 대한 정보는 물론, 제주와 제주사람들, 제주를 찾은 사람들 이야기가 워낙 시시콜콜. 인간 냄새도 물씬 나는 데다가 제주도에 대한 정말 많은 것들을 알게됐기 때문이다.

 

어둡고 쇠락해가는 분위기에서 밝고 활기찬 분위기로 변한 곳은 또 있다.  이중섭문화거리에서 북쪽으로 길 하나를 건너면 나오는 서귀포매일올레시장이다. 올레길은 시장 한가운데를 지난다. 1950년에 세워진 전통의 재래시장으로, 저녁 무렵인데도 활기가 넘친다.

 

시장입구에 붙어 있는 '경축' 플래카드가 눈길을 끈다. '2013년 중소기업청 평가 전국 1511개 시장 중 전국 4위(제주지역 1위)' 전국에 재래시장이 1511개나 있다는 것도 놀랍고, 4위 서귀포매일올레시장을 보고도 놀랐다. 서귀포에도 대형슈퍼마켓이 두개나 들어서서 밤늦게까지 영업을 하는 바람에 재래시장은 하루가 다르게 죽어가던 중이었다. 217개 점포 중 열여덟 개나 비어 있었다. 올레길이 시장 안으로 들어오고 시장 이름과 분위기를 바꾸고 나자 올레꾼 손님들이 밀려들었다. 비어있던 점포는 모두 찼고, 지금은 대기 명단까지 생겼다. -<폭삭 속았수다>에서

 

책은, 그러니까 제주올레 26코스는 우도올레에서 시작해 종달 올레로 끝난다. 26코스 모두 각 올레만의 지형적 특성과 역사, 접근 방법 등 각 올레길의 기본 정보는 기본, 걸으며 만난 풍경과 사람들 이야기를 살갑게 녹여 썼다. 수많은 이야기들 중 가장 신선하게 와 닿은 것은 '쇠소깍~외돌개 올레(6코스)'에서 만난 '서귀포매일올레시장' 이야기다.

 

원하는 물건을 가까운 곳에서 쉽게 살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주변에 대형마트가 생기는 것을 소비자로서 환영할 일이나, 재래시장이나 골목상권을 위협하기 때문에 가급적 이용하지 않는 편이다. 때문인지 아름다운 풍경을 즐길 수 있는 곳을 선택하는 대신, 재래시장 속으로 올레길을 냄으로써 여행자는 제주도의 속살을 좀 더 살갑게 만날 수 있다. 제주도 사람들을 살린 아이디어가 감탄스럽기만 하다.

 

저자에 의하면 제주올레가 지닌 특징이자 장점 중 하나는 이처럼 트레일을 걸으며 동네를 구경하거나, 제주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 외국의 유명 트레일의 경우, 길 중간에 동네가 나오면 마을을 우회하는 방법으로 길을 냈는데 제주올레길은 이처럼 시장 속 혹은 동네 안으로 길을 냄으로써 제주와 제주를 찾은 사람들을 쉽게 어울릴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냥 마을을 통과하며 마을을 만나고 느끼는 것으로 스치고 말지 않도록 여행자들이 묵는 숙소를 트레일이 지나는 동네 주택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했다. 이 책을 읽으며 '기회가 올 때까지 막연하게 기다리지만 말고 올해 계획을 세워 몇 코스만이라도 우선 걸어봐?'의 생각을 하게 한, 마음을 제주올레로 가게 한 제주올레의 장점이기도 하다.

 

여자이다 보니 여행을 계획하며 잠자리가 은근 신경 쓰인다. 그런데 올레길에서 만날 수 있는 동네 할망집(민박)에서 잠을 자면 제주도의 속살을 좀 더 만날 수 있고,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안심하고 잘 수 있을 것 같다. 여하간 이런 정보들 때문에 막연하게만 생각되던 제주올레가 훨씬 가까이, 그리고 구체적으로 느껴졌다.

 

전화를 걸어온 타이밍이 좋았다. 백 선배는 "너, 양말하고 속옷은 뭘 갖고 다니냐?"고 물었다. "둘 다 면인데요?" 상의나 바지는 저녁에 빨면 아침에 입을 수 있는 것이어서 여벌로 하나씩 있었다. 그러나 속옷과 양말은 열 벌 이상씩 가져왔다. 부피와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지난번에 이야기하는 걸 빼먹었는데…."하며 백선배는 '울양말'의 좋은 점에 대해 이야기했다. 두 켤레를 사서 하루 한 켤레씩 번갈아 신으면 된다. 여행 기간 내내 빨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귀에 쏙 들어왔다. 그 대신 울양말 안에 아주 얇은 양말을 신고 매일 그것만 빨아 말리면 된다고 했다. 울 양말이 좋은 이유는 젖은 상태에서도 체온을 보존해준다는 것이다. 울 장갑은 물에 젖어도 물을 짜서 끼면 따뜻하다고 했다. -<폭삭 속았수다>에서

 

이 부분도 솔깃하게 읽혔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많은 경험 그 결과 터득한 유용한 정보란 판단 때문이다.

 

저자가 제주올레길을 걸으며 만난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도 이 책이 재미있는 이유 중 하나. 해녀가 있는 곳에서는 해녀와 나눈 이야기를 통해 해녀에 대해, 마늘농사가 잘되는 곳에서는 마늘 농사를 짓는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 등, 그 코스에서만 만날 수 있는 사람들과 그들과 관련된 것들을 속속들이 소소한 재미와 함께 제주 각 지역의 특산물들을 아는데도 도움이 된다. 책 덕분에 짧은 시간에 제주도에 대해 참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 편의점에 물 한 병 사러 갔다가 250g에 만 원이나 한다는. 좀 비싸다 싶어 선뜻 사기가 망설여졌으나 그 가치를 느꼈다는 우도의 명물 땅콩 ▲ 제주에서는 딸 아들 상관없이 몇 명이라 하지 않고 몇 개라고 한다는 것 ▲ 오래 전부터 제주도의 특산품이 된 제주 감귤나무에 얽힌 고향사랑 ▲ 제주에선 남녀 구별 없이 윗사람을 삼촌(삼춘)이라 부른다는 것 ▲ 자녀가 결혼을 하면 함께 살지 않고 각각 딴 살림을 하는 제주만의 풍습 ▲ 돈짓당과 불턱, 살레, 쉰다리(순다리), 바농, 갈옷, 도구리 등, 제주도에만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도 인상 깊게 남고 있다.

 

책의 제목이 된 '폭삭 속았수다'는 '정말 수고하셨습니다'에 해당하는 제주도 말이라고. 책을 통해 제주올레를 걸으며 쉬고 싶은 사람 여럿을 만났다. 제주올레를 찾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왜 힘들게 걷는 것으로 쉬려고 하는 것일까. 자가용을 타고 쉽고 편하게 갈 수 있는 여행과 휴식을 선택하지 않고 왜 힘들게 걷는 것으로 쉬려고 할까? '걷는' 가치와 의미에 대한 그간의 생각들을 정리하게 한 책이기도 하다. 

 

사람에 따라 여행의 목적은 다를 것이다. 아름다운 풍경과 유명한 곳들을 많이 만나는 것보다 여행하는 그 지역만의 특징이나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여행의 목적을 둔 사람들이나, 많은 곳들을 가는 것보다 한두 군데 가더라도 그곳에서 많은 것들을 느끼는 것에 여행의 가치와 필요성을 둔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많은 즐거움을 주고 도움이 되리라.

덧붙이는 글 | <폭삭 속았수다>|성우제 (지은이) | 강 | 2014-01-10 |1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