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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이야기

조선일보 기자들, 쪽팔리지 않나?

한국에 있을 때, 조선일보 기자들과 어울릴 기회가 적잖게 있었습니다. 조선일보 기자들은, 남들이 뭐라 하든 말든, 언제나 자신감이 흘러 넘쳤으며 자사에 대한 자부심 또한 대단했습니다. 

  자신감과 애사심이야 저 또한 그들 못지 않았으나, 그들이 저를 두렵게 한 것은  다름아닌 취재력이었습니다. 물론 매체 파워가 한국에서 수위를 다투고 있으니 취재하기가 어느 매체보다 수월했겠습니다. 그러나 그 수월성을 넘어, 조선일보 기자들은 여타 매체 기자들이 지니지 못한 불같은 투지와 열성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마치 다른 나라에서 언제나 부러워 하는 캐나다 하키팀을 연상케 하는 막강 화력입니다.

  한국에서 기자들과 자주 접하는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조선일보가 욕은 먹지만 1등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야. 조선일보 기자는 기본 자세부터 정말 다르거든."

  '자세부터 다르다'는 것은 그만큼 열심히 한다는 뜻입니다. 조선일보야말로 '꺼진 불도 다시 보다'가  그 속에서 불씨를 발견하여 기사를 쓰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캐나다에 이민을 와서도 저는 그것을 개인적으로 체험했습니다. 신정아 사건이 터졌을 때, 뉴욕 특파원들은 신정아씨를 '잡으려고' 혈안이었습니다. 맨해튼 32가 코리아타운 한국식당들에 정보원을 심어놓을 정도였습니다. 

  신정아씨가 머무른 호텔들을, 조선일보의 라이벌 신문사는 누가 짚어주는 대로 확인도 않은 채 신문에 그대로 실었습니다. 왜 그게 그렇게 중요한 기사거리가 되는지 저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완벽한 오보였습니다.  

  그런데 조선일보 특파원은 남이 짚어주는 대로 쓴 게 아니라 아예 맨해튼의 호텔들을 뒤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수습 기간에 배운 대로, 속된 말로 발품을 팔아가며 바닥에서 기면서 저인망식으로 훑어간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보니, 사건 당사자에게는 엄청난 압박이 되었을 것입니다.

  신정아씨가 귀국을 하고, 뉴욕에서는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조선일보 특파원이라고 신분을 밝힌 사람이 제게 전화를 걸어왔습니다(저는 뉴욕에서 신정아씨와 단독으로 인터뷰를 했었습니다). "기사로 쓰지 않은 내용이 있다면 좀 달라"고 했습니다.

  "누구한테 내 전화 번호를 받았나? 선수끼린데 까놓고 말해보지."
  "선수끼리 뭐 그런 걸 묻고 그러나."

  물론 저는 제가 쓴 인터뷰 기사에 쓰지 않은 대목이 많이 있었으나 다른 신문사에 줄 수는 없었습니다. 줄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일보 기자의 그 끈질긴 기자 정신에는 탄복했습니다. 조선일보가 저렇게 오랫 동안 욕을 먹으면서도 1등을 하는 이유가 있기는 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조선일보의 고위 인사가 들어 있다는 장자연 리스트 사건이 터졌습니다. 소문으로만 돌다가 급기야 면책특권을 지닌 국회의원이 그 이름을 공개했습니다. 조선일보는 발빠르게 대표선수를 내세워 칼럼을 쓰며 대응했습니다.  "우리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랗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칼럼과 이어지는 논설들을 보면서 저는 '조선일보가 유리한 팩트만을 선택해 그것이 마치 전체인 양 만드는 데 참 탁월하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지난번 글에서 썼듯이, 한 가지 미심쩍은 대목이 있었습니다. 다름아닌 조선일보 기자들과 그들이 지닌 불같이 끈질긴 취재력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경찰의 발표대로라면, 조선일보의 고위 인사는 장자연 리스트에는 올랐지만 장자연씨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경찰의 발표를 100% 믿는다 하더라도, 조선일보의 표현대로 조선일보는 지난 49일간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스타일을 크게 구겼습니다.

  지난 49일 동안 구설수에 오르면서 자사의 스타일이 저렇게 망가지고, 이른바 진보 언론과 단체와 일부 네티즌 들로부터 그렇게 시달림과 손가락질을 당했는데도, 왜 조선일보 기자들이 끝끝내 '인내'만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조선일보가 특정 사실을 두고 저렇게 수세적 방어만 하는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사건을, 나라를 뒤흔드는 사건으로 만드는 위력을 지닌 조선일보의 기자들이 이번에는 왜 그렇게 조용한 것인지, 저는 조선일보의 저런 모습을 처음 봅니다.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밝혀졌다면, 이제는 아무런 관련 없는 사람의 이름을, 누가,  왜 함부로 그 리스트에 올렸는가를 조선일보 기자들이 취재해야 합니다. 사실과 다르게 자사의 이미지를 그렇게 흠집낸 사안에 대해, 언론사 가운데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해 사건을 보도하고, 칼럼과 논설을 쓰면서 방어를 해온 조선일보가, 왜 평소와 같은 공격적인 면모를 드러내 보이지 않는지 저로서는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평소 조선일보 기자들이 보여준 기자로서의 탁월한 공격성과 끈기가 발휘되어야 할 시점입니다. 취재의 요점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우리 고위 인사의 이름이 왜 그 리스트에 올랐나'입니다. 49일 동안이나 공박을 당한 것이 억울하지도 않을까요? 

  또한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을 이른바 성접대 리스트에 올려 그 명예를 크게 훼손한 데 대해, 조선일보처럼 큰 힘을 지닌 신문이 그냥 그대로 넘어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조선일보 기자답게 매섭게 취재하여, '장자연리스트에 우리 고위인사 이름을 올린 것은 조선일보를 음해하는 세력의 음흉한 책동'이라는 결론을 내더라도 저는 그대로 믿겠습니다. 

  조선일보 기자답게, 사건이 다 끝난 뒤에도 이삭을 주으려고 토론토라는 변방에까지 전화를 거는 끈기와 열의를 발휘해 '왜 조선일보 고위 인사의 이름이 장자연리스트에 올랐는가'를 취재, 보도해주면 좋겠습니다. 아니, 고맙겠습니다. 그래야 의문이 말끔하게 풀리고, 경찰 발표를 불신하는 세력들을 잠재울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렇게 해야 사람들이 전두환 시절의 경찰 발표처럼 거꾸로 생각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경찰의 공신력 회복을 위해서도 더없이 좋겠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조선일보 기자를 조선일보 기자답게 만듭니다. 조선일보 기자가 조선일보 기자답지 않다면, 이번 사건과 경찰의 발표 사이에 뭔가가 개입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조선일보 기자를 조선일보 기자답지 않게 만드는 위력적인 그 무언가가 작동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선일보 기자가 조선일보 기자답지 않으면 정말 '쪽팔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건투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