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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문학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이끼로 환생한 까닭은?


 

뉴욕에서 작가 장홍선씨를 만났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뒤 자동차를 타고 북동쪽으로 1시간30분을 달렸다. 뉴헤이븐. 작고 아담한 도시. 토요일 오전이어서 거리는 한산했다. 눈에 띄는 사람들은 대부분 대학생으로 보였다. 세계 최고의 명문인 예일대의 공부벌레들이다.

장씨의 개인전은 예일대 근처 아트스페이스(3월23일~5월1일)에서 열리고 있었다. 오렌지스트리트 50번지. 길 모퉁이에 위치한 이 갤러리 역시 아담했다.

그러나 작은 도시에 있는 큰 대학 예일처럼, 갤러리의 포스가 만만치 않다는 느낌을 주었다. 아트스페이스는 비영리갤러리로서 지난 수십 년 동안 실험정신으로 무장한 아티스트들로 하여금 지적 도발을 감행케 한 터전이었다.



아트스페이스에 나온 장씨의 작품은 넉 점. 모두 설치작품이었다. 그 넉 점을 묶는 키워드가 금방 읽히지 않았다. 천장에서 물결 무늬로 알록달록한 무엇이 흘러 내리는가 하면, 그 아래 구멍이 뚫린 은빛 바위 형상이 덩그렇게 놓여 있기도 했다.

 그 반대 편에는 흑판 위에 흰색으로 형상화한 풍경화가 보이는가 하면, 밑동만 달랑 남은 검은 색 나무가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몇 번을 돌아가며 들여다 보았다. 그제서야 작품들을 관통하는 그 무엇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첫째, 작품의 재료가 현대 사회 대량 생산의 부산물이자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일상 재활용품이라는 것. 둘째, 인공적인 그 재활용품들이 모두 자연물의 형상을 만들고 있다는 것. 셋째, 모양이 거칠고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예쁘고 보는 재미를 준다는 것.

작가는 일상 용품으로 만들어진 갖가지 형태의 설치물을 이용하여 보는 이들을 대상으로 지적인 게임을 벌이는 듯했다.

동굴 천장에 흘러내린 종유석 또는 바위 위에서 자라는 이끼 형상으로 보이는 것들이 천장에서 시작하여 물결 무늬로 벽 한 쪽을 절반쯤 채우고 있다. 죽은 나무에서 자라는 버섯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오그래픽 웨이브>라는 작품이다.



물결 무늬 위로 글씨가 언뜻언뜻 비친다. 인간의 문명과 자연 생태를 주 내용으로 다루는 월간지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다. 이 잡지를 한 장 한 장 뜯고 다시 오려 붙여 이끼 혹은 물결 무늬의 종유석 형상을 만들어냈다. 뜯고 자르고 붙이고 하는 엄청난 수고가 읽히는 작품이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인가? 이중 삼중의 역설과 아이러니가 엿보인다.

자연과 인간 문명을 내용으로 하는 잡지는 한 장씩 뜯기어 해체된 다음, 작가의 손을 통해 새로운 자연 형상물로 재탄생했다. 자연을 주요 소재로 다루는 잡지이면서도 결국 문명의 부산물, 곧 쓰레기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의 이 잡지에 작가는 생명을 불어넣어 자연으로 다시 돌려보낸 셈이다.

작가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쌓인 역사성 또한 작품에 담았다고 했다. 어느 30년 정기 구독자에게 300여 권을 구입한 뒤 해체, 재구성하면서 예술로써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다. 이 잡지의 30년 세월은 결국 자연의 위대함을 이야기한 것이며, 월간지로서의 생명이 끝난 뒤에는 작가의 손을 거쳐 자연물이라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장홍선의 작품에는 이렇듯 여러 의미가 중층적으로 포개져 있다. 작품을 느끼고 읽어가다 보면 마치 양파를 까듯 의미들이 하나 둘씩 새롭게 드러난다.


<무지개 숲>이라는 작품이 있다. 몸통과 뿌리가 잘려나가고 밑동만 덩그러니 남은 나무 형상이다. 얼핏 보기에, 숲 속에서 흔히 발견되는 오래된 나무 밑동일 뿐이다. 베어진 지 오래된 듯 색깔도 검게 변했고, 거미줄 같은 것이 엉켜 있다. 나무의 잘린 면에는 버섯이 핀 듯 색깔이 알록달록하다.

비록 생명은 다 했으나 숲이라는 자연의 한 부분을 이루는 이 나무는, 놀랍게도 갖가지 인공적인 것들로 만들어져 있다. 커피를 젓는 검은색 플라스틱 수만개를 강력 접착제로 붙이고 붙여 나무 형상을 만든 다음 갖가지 색깔의 포스트잇을 돌돌 말아 그 안에 끼워 넣었다. 거미줄은 플라스틱을 불에 녹여 만들었다.

이 작품에서 읽게 되는 것 역시 역설과 아니러니이다. 인공적인, 너무나 인공적인 재료로 만들어진 나무가 어떻게 이토록 자연스럽게 보일까?

 가장 인공적인 것으로 가장 자연스러운 것을 드러내기. 이 같은 역설을 담은 장홍선의 작품들은 대량 소비를 위해 끊임없이 대량 생산에 몰두하여 부산물을 만들어내는 인간 행위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자 야유로 읽힌다. 자연은 이제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다. 인공 물질의 과잉으로 인해 모든 것이 파괴되고 그 후 새롭게 나타나는 자연은, 장홍선이 드러내듯 모두가 인공의 자연이 될지도 모른다. 무서운 경고이다.

작품에 내포된 의미는 이렇듯 무겁지만 그 표현 방식은 가볍고 발랄하다. 장홍선의 작품들은 겉보기에 모두 쉽고 재미있어 보인다. 보는 이로 하여금 작품에 무심코 다가가게 만든다.

바위 덩어리 같은 은색 작품(<Kaleidoscopic>)이 있다. 바위 형상이지만 은박지를 구겨 만들어 가볍고 약해 보인다. 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안에 보석이 자라는 비경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장홍선의 작품은 뜻과 의미를 읽기에 앞서, 그 형상 자체가 보는 재미를 안겨준다. 인공 물질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면서, 거기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한다는 무거운 개념을 이야기하면서도 장홍선은 그 과정을 이렇듯 가볍고 발랄하게 드러낸다. 작지 않은 미덕이다.

이 같은 작품 개념과 접근법이 만들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1999년 단국대 서양화과를 졸업하자마자 미국에 건너왔다는 작가는, 2001년 사진을 공부하기 위해 ‘로체스트 인스티튜트 오브 테크놀로지’ 대학원에 진학했다. 코닥에서 지원해 만든, 당시 사진학과로는 미국에서 손꼽히는 곳이었다.

대학원을 마치고 생존을 위해 잠시 ‘비즈니스’에 몰두했다고 했다. “작업에서 떠나 있었더니 몸이 아플 정도로 답답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가 돌아온 곳은, 뜻밖에도 대학원에서 어렵게 공부한 사진이 아니라 설치 장르였다. 설치는 이녁의 생각을 드러내는 데 가장 적절한 그릇이었다. 대학시절 콜라주와 오브제 작업을 했던 것이 설치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이다.  

파괴의 상징인 문명의 부산물을 해체하여, 마치 연금술사처럼 새로운 모습의 자연물로 빚어내는 개념, 곧 해체를 통해 새로운 생성을 드러내는 그의 작업은 지금 도시의 내적 풍경을 그리는 데까지 나아가 있다.



오는 9월 그의 네번째 개인전에서 본격적으로 선보이게 될 <Zip City>는 숨쉴 틈 없이 무한정 확장해가는 도시의 속성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다. 물건을 묶는 플라스틱‘케이블 타이’를 이어 만든 이 작품은, 도시가 얼마나 정형화했는가, 또 습기 만난 곰팡이처럼 얼마나 빠른 속도로 증식해 나가는가를 보여주면서 경쾌하고 신랄하게 야유하고 있다. 도시가 제 아무리 나름의 특성을 갖췄다고 하나, ‘우편번호(Zip Code)’로 구획된 철창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이 작품은 건물의 철골 구조와 같은 형상으로 드러내 보인다.

장홍선의 네번째 개인전은  노스캐롤라이나 샤롯트에 있는 맥콜비주얼아트센터에서 열린다.

 

 

장홍선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단국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2001년 미국 로체스트 인스티튜트 오브 테크놀로지 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쳤다. 그동안 미국에서 세 차례 개인전을 가졌으며 다수의 그룹전 및 레지던시에 참가했다. 



<월간미술> 2010년 8월호에 실린 원고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