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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문학

전자책 시대의 글 쓰기, 혹은 글 읽기 - 돈 들릴로의 경우

돈 들릴로(Don DeLillo, 사진)의 책을 한 권 갖고 있습니다. Underworld라는 책입니다 (아마존의 검색창에 무턱대고 underworld만 입력했더니 3류 뱀파이어 영화 DVD만 좌르륵 나옵니다. 앗 뜨거!). 언론의 극찬을 보고 나서 덜컥 산 책입니다. 우선 8백쪽이 넘는 그 방대한 분량에 주눅이 들었고, 몇 페이지 들춰보다가 그 영어의 높디 높은 벽에 짓눌리고 말았습니다. 언젠가는! 읽어야지, 라고 생각하고 책꽂이 안으로 밀어넣은 게 벌써 10년쯤 되는 것 같습니다. 그의 책은 아직까지 한 권도 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여러 언론의 리뷰와 보도를 통해 그의 명성은 계속 확인받아 왔습니다 (위키피디아). 그와 함께, 제가 그 이름만 듣고 아직 책 한 권 못읽어 본 '좋은 작가'로는 조너선 후랜젠(Jonathan Franzen)이 있습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The Corrections가, 역시 제 책꽂이 안에서 몇년째 '동면'중입니다 (이런 식이라면 제 서가를 A shelf of forgotten books라거나 A shelf of unread books라고 불러야 할지도...).

돈 들릴로가 다시 제 앞에 나타난 것은 아래에 소개하는 인용문 때문입니다. 영국의 진보적 일간지 가디언의 웹사이트에서 '전자책이 걸작 집필에 종지부를 찍을 것인가? (Will e-books spell the end of great writing?'이라는 기사에 그의 말이 나왔습니다 (실제 기사는 가디언의 자매지인 '옵서버'에 실렸군요):

"내겐 자판의, 수동 타이프라이터 자판의 소리가 있어야 한다. 해머가 글자를 종이에 찍는 소리 말이다. 나는 말이, 문장이, 그 틀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게 좋다. 그것은 내게 미학적인 문제이다. 글을 쓸 때 나는 내가 만들어가는 말의 형상에 대해 조각가와 같은 감각을 갖는다." (출처: 영국 가디언)
"I need the sound of the keys, the keys of a manual typewriter. The hammers striking the page. I like to see the words, the sentences, as they take shape. It's an aesthetic issue: when I work I have a sculptor's sense of the shape of the words I'm making." (Source: Guardian).

아마존 킨들, 닌텐도 DS, 아이폰 등이 책의 기능을 일부, 때로는 완전히, 대체해 가는 시대, 과연 들릴로가 보여주는 것과 같은 전통적 방식의 글쓰기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러한 고통스러운 '노동'이 앞으로도 가능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디지털화하고, 하이퍼링크로 촘촘히 연결되고, 온갖 유형의 미디어가 통합되는 신세계가, 과거 찰스 디킨스나 셰익스피어, 그리고 근래의 들릴로가 고집해 온 것과 같은 수공업적 상상력과 글쓰기를 허락할 것인가, 등등을 이 기사는 톺아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대체로 부정적입니다. 그래서 걱정스럽고 두렵고 슬프다는 톤을, 그 기사에서 읽습니다. 전자책 시대의 글 읽기, 글 쓰기 - 좀더 고민해 봐야겠습니다.